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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291
한자 龍山里
영어음역 Yongsa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산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승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4.60㎢
총인구(남, 여) 702명[남자 345명, 여자 357명]
가구수 341가구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용반리의 ‘용’자와 유산리의 ‘산’자를 따서 용산리(龍山里)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기 금구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반리·유산리·등룡리 각 일부, 서도면 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산리라 하고 김제군 하리면에 편입하였다. 1935년 용산리금산면에 편입함에 따라 김제군 금산면 용산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환경]

동쪽으로 구성산(九城山)[487.6m]이 형성한 산지가 있고, 서쪽으로 구릉과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소규모의 하천 지류가 북쪽의 금구천(金溝川)으로 흘러든다.

[현황]

금산면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9월 현재 면적은 4.60㎢이며, 총 341가구에 702명[남자 345명, 여자 35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지 면적은 밭 0.66㎢, 논 1.16㎢이다. 서쪽으로 김제시 봉남면 평사리, 북쪽으로 금구면 용복리와 이웃하고 있다. 호남고속국도국도 1호선, 국도 21호선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고, 국도 변에 목우촌 김제돈육가공공장이 들어서 있다.

자연마을로 용반·용정·대유·송정·유산·율리·기룡 등이 있다. 용반은 대유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1600년경 전주이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이래 전주최씨, 해주오씨, 동래정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되었다. 처음에 금구현 남면에 속하였고, 1914년 하리면에, 1935년 금산면에 편입하였다. 동쪽의 구성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용이 서려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용반이라 하였다. 마을 서남쪽에는 심은 지 100여 년이 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남원에서 와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이 구성산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용정은 대유 북쪽에 있는 마을로, 1825년경 달성서씨 서의삼이 터를 잡고 살면서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고, 그 용이 마을 우물에서 나왔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대유는 용산리 가운데 있는 마을로, 1400년경 김해김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형성되었다. 원래 이름은 고리배미로, 마을 주위가 배의 형국이고 마을이 배를 매어 두는 긴 밧줄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옛날에는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는데, 배가 들어오면 배를 매어 두기 위한 고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유로 고쳤다. 마을 앞에 봉남면 내주 경주이씨 선산이 있는데, 선산에 석물을 세워 놓으면 봉남면 동령에 사는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 하여 밤에 와서 뽑아 버리곤 했다고 한다.

송정은 대유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정조 때 평해황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뒷산 소나무 숲에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유산과 율리는 대유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1620년경 덕수이씨가 처음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배를 풀리지 않게 붙잡아 묶어 두는 곳이란 뜻에서 배메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둘로 분리하여 각각 유산과 율리로 고쳤다.

기룡은 모악산(母岳山)[793.5m] 줄기가 뻗어 내려 구성산을 이루었는데, 그 아래쪽 마을에서 용이 일어나서 용반에서 서려 놀다가, 봉남면 주자에서 여의주를 얻고 봉남면 등용에서 승천할 것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500여 년 전에는 기와집이 많은 큰 마을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주위에서 기와 조각, 구들, 주춧돌, 그릇 조각 따위가 출토되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1922년 갈대와 가시덤불만 우거진 이곳에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살피던 충주의 지리학자 강릉최씨 최담과 경상도 울진 태생의 인동장씨 장병옥이 후세에 길이 빛날 터를 잡은 이래, 1946년 증산교의 계파인 삼덕교 교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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