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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현 모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81
한자 朴弼顯謀反
영어의미역 Rebellion of Bak Pilhy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덕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모반사건|반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728년(영조 4) 3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728년(영조 4)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박필현|이인좌

[정의]

1728년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박필현을 비롯한 소론과 남인이 영조의 집권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

[개설]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의 과격 세력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는데, 호남 지역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1680~1728]이 가세하였다. 박필현은 수천군을 영솔하고 전주성을 습격하려고 금구 부근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가는 길목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길가에 앉아 상에 물 한 그릇을 떠놓고 대성통곡하는 여인이 있음을 보고받은 박필현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금구를 비켜 다른 길을 택하라 명하였다.

다른 길이 없다고 하자 박필현은 크게 노하여 산을 깎아 길을 내라고 호령하였다.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길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하며, 통로하기에 여러 날이 걸렸으므로 전주감영에서는 군병을 긴급 소집할 시간을 벌었다. 전주감영에서 박필현의 입성을 기다려 좌우로 협공하니 박필현군은 대패하여 모두 생포되었다. 전주 삼천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궤멸해 도주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역사적 배경]

박필현 모반 사건의 원인은 1717년(숙종 43)의 정유독대(丁酉獨對)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숙종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이균[후에 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이명(李頤命)과 독대하여 연잉군[후에 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숙종이 죽고 나서 노론측은 그의 탁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世弟)에 책봉하였다.

경종이 죽고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조였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소론은 정치적 기반에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박필현·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 과격한 소론 세력은 숙종 대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 측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목적]

박필현·이인좌 등의 반란은 1728년(영조 4) 정권에서 밀려난 정치 세력이 국왕 타도를 목적으로 내걸고 일으킨 반란으로, 이는 노론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기 위함이었으며 하층민도 광범위하게 참여한 반란이었다.

[발단]

이인좌·박필현·이유익 등 정권에서 배제된 유력 가문의 후손들은 1728년(영조 4) 3월 영조에 반대하며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여 정국을 주도하고자 정변을 개시하였는데, 여러 지역에서 동조자가 일어나 큰 규모의 병란으로 전환되었다.

[경과]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거병(擧兵)하였다.

[결과]

영조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강력한 왕권을 내걸고 붕당(朋黨)을 억누르는 탕평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반란의 중심을 차지하였던 소론 세력은 이 사건 이후 정국 주도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16세기 말 이후 계속된 전통적인 붕당은 정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지방에서는 토착 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의의와 평가]

박필현 모반 사건은 이인좌와 함께한 반란 사건으로서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지배층 내부의 반란이었지만, 억압적인 사회 현실에 불만을 느낀 하층민들도 대거 참여한 사건이었다. 이는 지배층의 권력투쟁 성격의 반란에서,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나 1862년(철종 13) 농민항쟁과 같이 민중이 중심이 된 변란과 민란으로 변화해 가는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다. 또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길은 이때 만들어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여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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