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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773
한자 柳永完
영어음역 Yu Yeongwa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진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화가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성별
생년 1892년연표보기
몰년 1953년연표보기
본관 문화(文化)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서화가.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유하(柳下). 아들로 동곡 유근상[1909~?]이 있다. 유근상은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아 문인화에 두루 능하였으며, 특히 묵죽이 간결하였고 화풍이 맑았다. 묘소는 김제시 백산면 KBS 송신소가 있는 선영 아래 자리하고 있다. 묘비가 없어 후손이나 친지와 함께 가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활동사항]

유영완(柳永完)[1892~1953]은 지금의 김제시 교동[옛 향교골]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천자문(千字文)』을 외우고 사서삼경을 공부하면서 11세에 필묵을 갖춰 석정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서 정식으로 공부하였다. 이때에 가장 기초 학습인 해서의 구양순 서첩 ‘예천명(醴泉銘)’을 배웠으며, 이정직이 소장한 미불·동기창·채양·안진경 등의 서첩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대나무 그림에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 방법과 이정직의 화론 및 다양한 이론을 학습하였다. 유영완은 청빈한 생활에 제대로 지필묵을 갖출 수 없어 먹물 대신 물을 찍어 목판에 글과 그림을 그려 목판이 썩기까지 했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정직은 호남 삼절의 하나인 매천 황현(黃玹)해학 이기(李沂) 등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문우인 이기가 1909년 세상을 떠나고 1910년 국권 피탈이 일어나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자 이정직도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유영완이정직의 필법과 예술 정신을 이어받아 자가풍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개척하여 청년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국필로 알려졌는데 독립선언서 33인 대표 중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우연히 전라도에 들려 유영완의 글씨를 보고 장래 대성할 수 있는 재질을 갖춘 글씨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구양순의 예천명에 빠져 있는 유영완에 대해 유재 송기면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글씨에서 예천명이란 『맹자(孟子)』「호연장(浩然章)」과도 같다. 이는 모두 기력이 넘치지 못하면 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금에 예천명을 배운 사람은 많으나 그 심오한 경지에 올라선 자가 적은 것은 모두 기력이 미치지 못한 데 잘못이 있다. 유하 유영완은 글씨를 쓰면서 예천명을 지독하게 좋아하여 수십 년 동안 임서(臨書)를 하여 몇 백 번에 이르렀다. 그의 뜻은 솔갱체[구체]의 골자를 뽑아내고자 다짐한 것으로 단순히 황태사와 같은 데 그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뜻은 참으로 고심참담(苦心慘憺)하다 할 것이다.” 즉 유영완의 피나는 구체의 임서는 그만의 독특한 해서체를 탄생시켰고, 비록 구양순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고 뒤지지 않을 만큼 정교함과 엄중함을 글씨 속에 갖추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영완에 대해 대나무에 뛰어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가 대나무를 치는 데는 바로 구양순의 해서체가 뒷받침되고 있다. 유영완의 해서는 필획의 강건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며, 무엇보다도 조선의 단아함과 선비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유영완이 즐겨 그리는 묵죽도에는 선비의 기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대나무 잎이 치켜 올라가는 앙죽도에서는 화법의 기본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영완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유가적 학통을 계승하여 학습하였고, 자연스럽게 김제 지역 서화가의 거장인 이정직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그의 실학적 정신과 학문을 받아들였다. 현재 남아 있는 문집이 없어 철학적이며 유가적인 성향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천하는 집념과 의지가 굉장히 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묵죽도를 보면 강직한 성격과 내면적으로 훈훈한 인간미가 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제 글씨는 행초서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림과 혼연일체가 된다고 평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술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예술가답게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작품 소장처는 전북도립미술관·강암서예관 등이며, 많은 사람들이 개인 소장하고 있다. 금석으로는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 있는 성모암(聖母庵)의 진묵조사존비지묘(震默祖師尊妣之墓) 전면을 구양순체로 썼다.

[상훈과 추모]

수상 경력으로는 25세 때인 191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묵화로 처음 특선을 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작품을 낸 것이 아니라 주위 친구들에 의하여 출품되었다고 한다. 이때 유영완은 특선을 반가워하기는커녕 작품을 낸 친구들에게 오히려 역정을 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그의 고답적이고 고고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후 1928년 제7회 조선전람회에서 행서로 입선하였고, 1929년 제8회 조선전람회에서 초서로 입선하였다. 또 1949년 광복 국전 제1회에서 입선한 경력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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