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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277
한자 敎會
영어의미역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엽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기독교를 신앙하며 종교 활동을 하는 공동체.

[개설]

호남에서도 손꼽히는 곡창 지대로 알려진 김제 지역은 그 지리적 특성상 다양한 교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육로와 수로 등 다양한 통로를 거쳐 전파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제 서부 지역은 군산 선교부의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가 만경강을 건너와 1886년 송지동교회를 세우는 등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복음이 퍼져나갔다. 반대편인 김제 동남부는 전주 선교부의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가 모악산을 넘어 전도하러 다니다가 조덕삼·이자익 등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1905년 팟정이교회[지금의 금산교회]가 세워지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김제 지역에 활발하게 기독교가 전파된 또 하나의 배경은 갑오동학혁명 직후 상당수의 동학교도들이 기독교로 귀의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1900년 동학 세력이 집단으로 개종하면서 세워진 입석리교회[지금의 봉월교회]이다. 이처럼 군산 선교부와 전주 선교부의 동시적인 접근으로 김제 지역 복음화는 빠르게 진행됐지만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나타났다. 경쟁적으로 두 선교부가 교회를 세우면서 지역 자체가 양분되다시피 한 것이다. 김제 지역 교회들이 처음부터 하나의 노회로 출발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전북노회와 군산노회로 나뉘어 있던 까닭도 여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변천]

1917년 전북노회 창립 당시 김제 지역에는 13곳의 교회가 있었다. 이는 10년 후 26곳으로, 다시 10년 후에는 40곳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1939년 군산노회가 전북노회에서 분립되면서 김제 지역 교회들은 서북 지역은 전북노회, 동남 지역은 군산노회에 속하게 된다.

해방 후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양분된 교회들이 하나의 노회로 합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6년 제6회 군산노회 2차 임시회에 김제노회 조직 청원이 안건으로 상정됐다. 그러나 군산노회나 전북노회 모두 김제노회 분리를 허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김제노회가 조직되면 당회 수가 감소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정치적·재정적 약화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김제노회 조직 청원은 4년 넘게 상정과 부결을 반복하며 표류가 계속되었다. 더욱이 전북노회가 역으로 전북노회·군산노회의 합병을 청원하고, 제34회 총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두 노회의 합병을 지시하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결국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챈 김제 지역 교회들은 1947년 독자적인 성경학교 개설로 한 차례 실력 행사를 한 뒤, 두 노회에 안건을 상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1949년 제35회 총회에 김제노회 분립을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4월 19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드디어 김제노회 문제가 정치부 서기에 의해 보고되었다. 전북노회와 군산노회 총대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이 문제는 표결에 붙여졌고, 찬성 53표, 반대 14표로 김제노회 분립이 가결되었다. 4년간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이룬 순간이었다.

김제노회 창립일은 그 해 5월 31일로 정해졌고, 장소는 김제중앙교회로 결정됐다. 소집장은 당시 대송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응규 목사였고, 조직지시위원은 금산교회 출신으로 총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했던 이자익 목사였다. 두 노회로 흩어졌던 김제 지역 40여 교회들이 마침내 하나가 되는 자리였다.

김제노회 창립은 당시 군 단위 지역에서는 용천노회에 이어 두 번째로 벌어진 일이어서 많은 관심을 모았다. 초대 노회장에는 김응규 목사가, 서기에는 김제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최의종 목사가 각각 선출됐다. 그러나 노회가 창립된 지 불과 1년 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김제노회는 많은 것을 잃었다. 만경교회·대송교회·대창교회 등이 특히 큰 피해를 입었고, 김종한·안덕윤 목사는 인민군의 손에 의해 순교하고 말았다.

그런 전쟁의 참화 가운데도 김제노회는 남녀사경회, 주일학교대회, 교사강습회 등을 열면서 복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56년에는 55곳으로 교회가 늘었고, 특히 교인 총수는 1949년 노회 출범 당시 3,000명에서 1만 4050명으로 5배가량 급증했다.

1957년 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며 교회 일꾼들을 길러내는 데 주력하던 김제노회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컬 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김제노회 총대들은 현장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으나 교단의 분열에 따른 노회의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김제 지역은 진보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분리되고 있었으나 노회장과 서기 등 주요 보직은 연동측이라 불리던 에큐메니컬 지지 인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수의 교회들이 보수 진영을 택했다. 여기에는 김제노회 내 친목단체인 24장로회가 보수 진영으로 결속했고, 이북 출신 월남 교역자들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다는 설명도 있다.

어렵게 큰 고비를 넘긴 김제노회는 곧바로 조직을 정비한 뒤 교회 설립에 힘쓰며 교세의 확장을 도모했다. 꾸준한 성장세 속에서 1983년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독립된 노회회관이 건축되었다. 또한 1990년 제75회 총회가 김제중앙교회에서 유치되고, 이 교회 유인식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면서 김제노회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초기의 교회들]

1. 송지동교회

군산 선교부에서 담당했던 김제 서남 지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만경강 상류를 따라 김제군 공덕면 송지동에 사는 송원선(宋元善)을 비롯하여 강문성, 최치국, 문종삼 등이 전킨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1896년 송지동교회를 설립하면서였다. 이것이 김제 서남 지방에 최초로 기독교가 뿌리 내리게 된 내력이다.

송지동에 첫 기독교를 전파한 던킨 선교사는 그 후 송지동교회를 지도하면서 김제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의 전도를 받고 교회가 하나하나 설립되자 학교도 병설하여 운영하였다. 1903년에는 당시 김제군 봉난면 월성리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역시 같은 해 던킨 선교사는 부량면 대장리에 교회가 설립될 때도 적극 도와주었다.

2. 월성리교회

월성리교회는 설립된 지 2년 만에 월성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전주 선교부 아눌서 선교사의 어학교사이던 김필수가 처음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몰려오는 학생들을 감당할 수 없어 다섯 칸짜리 한옥을 건축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교회는 비록 신도 수는 적었지만 신학문을 가르치겠다는 의지만은 강하였다. 신학문이라야 한글이 고작이었지만 차차 새로운 학문들이 유입되었다.

이 학교의 초대 교사였던 김필수는 일찍 서울에서 개화의 문화를 접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어 김옥균이 이끈 개화파의 일원이 되면서 전주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월성리교회에 뜻하지 않은 일꾼이 나타났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개화해야만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박금이란 청년이 월성리교회에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박금은 원래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와 함께 김제 지역으로 이주한 뒤 월성리에 자리 잡고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큰 재산을 모았다. 이후 그는 월성리교회 초대 장로가 되어 월성리교회와 월성리학원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3.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1905년부터 3년 동안 지역 유지였던 조덕삼의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보았다. 그 후 70여 명에 불과하던 신도가 200~300명으로 불어나자 1907년부터 현재의 위치에 목조 5칸 ‘ㄱ’자 교회당을 짓기 시작하여 1908년 4월 4일 완공하여 헌당식을 올렸다. 금산교회는 지금도 당시의 교회 모습이 원형 그대로 잘 남아 있다. 전형적인 조선 중부 지방의 구조 ‘ㄱ’자형으로 교회당을 지은 것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예배 보는 장소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교회 내부 옆 벽에는 금산교회의 유래와 그 시절의 사진, 초창기 교회 「당회록」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금산교회는 1999년 전라북도 문화재재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현황]

김제노회는 2010년 현재 6개 시찰, 89개 교회에 총대 20명을 파송하는 노회로, 전라북도 지역은 물론이고 교단 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규모뿐만 아니라 사회복지관 위탁 운영과 최저 생계비 제도 실시 등 다른 지역 노회에서는 볼 수 없던 사업들로 선진화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최고의 역사를 지닌 송지동교회, 문화재로 지정된 옛 ‘ㄱ’자 예배당으로 잘 알려진 금산교회와 대형 교회로 성장한 김제중앙교회와 신광교회 등등이 김제노회의 주요 교회들이다.

[의의와 전망]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의 사회사업은 그 교회가 위치한 지역 사회의 원활하고 바람직한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가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경제 성장과 공업화가 진전된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 복지가 열악한 김제시 농촌 지역의 경우 교회는 무엇보다 복지 목회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신도수가 적고 대부분 경제력이 없는 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 재정의 자립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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