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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297
한자 水流聖堂
영어의미역 Suryu Catholic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223[수류로 643]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당
설립연도/일시 1889년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해당사항 없음
전화 063-544-5652
팩스 063-544-5654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에 있는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성당.

[개설]

1890년대 호남에는 3개의 성당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로 귀의시켰다. 되재본당[전라북도 완주 화산], 나바위본당[당시 익산군 망정면 화성리], 수류본당[당시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화율리]이 바로 그곳이다. 수류성당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변천]

수류본당은 1889년 장약슬(張若瑟)[J. Vermorel] 신부가 당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安德里)에 설립하였던 배재본당이 그 모태로서, 배재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82년 가을 류달영(柳達榮)[A. Liouville] 신부에 의해서였다. 그 후 장약슬 신부가 고산 배재[완주군 운주면 구제리, 일명 수티[秀峙]]에 거주하면서 1888년 가을부터 1889년 1월까지 전라도 남쪽 지방의 공소 판공을 치렀다.

한편 장약슬 신부는 배재가 자신이 담당하는 공소들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사목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과의 문제도 없어 본당을 설립하기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약슬 신부는 1889년 봄 금구 배재공소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고, 배재공소는 곧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그해에 56명을 영세시킨 데 이어 수류공소를 설립하였다.

1893년 4월 조조 신부가 후임으로 본당에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있었던 갑오농민전쟁으로 인해 7월 27일 성환(成歡)에서 청나라 패잔병들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마부 정보록[바오로]과 함께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한동안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가 배재본당을 임시로 맡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5년 5월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구마슬(具瑪瑟)[M. Lacrouts] 신부는 본당 발전을 위해서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해 10월 초, 면 소재지가 위치한 수류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새 성당 소재지를 물색하던 라크루 신부는 이영삼 진사의 수류재실(水流齋室)을 매입한 뒤 안채는 사제관으로, 행랑채는 임시 성당으로 개조하였으며, 1897년 9월에는 남교우청과 여교우청에 각각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수류에 성당이 마련되자, 그동안 제대로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던 각처의 신자들이 수류로 이주해 옴으로써 수류는 이제 완전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구마슬 신부에 이어 1900년 5월 제4대 주임으로 부임한 배가록(裵嘉錄)[C. Peynet] 신부는 1906년 1월 라크루 신부가 확보한 대지 위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1907년 음력 8월 48칸의 목조 성당을 건축하였는데, 시골에서는 처음으로 웅대한 한국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 되었다.

그해 10월 1일 드망즈 신부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수류본당은 김제·부안·정읍·순창·고창·담양·장성 일대에 걸친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또 본당에서는 교육 사업으로 1909년 3월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설립했는데, 설립 당시 학생 수는 65명이었고 교사는 3명이었다. 인명학교는 1913년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여학교도 개교했으나 재정 상태가 빈약하여 학교 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결국 1928년에 재인가를 받지 못하고 폐교하고 말았다.

한편 제5대 주임 유가홍(柳嘉鴻)[L. Lucas] 신부 때에는 성가회(聖家會)에 가입하여 그 규칙을 지키는 가정이 100여 세대나 되는 등 신앙생활에 열심인 가정들이 많았으며, 그 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세가 급성장하자 본당에서는 인근의 본당들과 피정·성체 거동 행사 등을 합동으로 추진함으로써 공동체 활성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30년 초에는 4곳에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1935년 1월에는 김토마스와 최시몬이 율치공소에 야학을 설립하여 한글과 경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7년 2월 제8대 주임으로 부임한 석종관(石鍾寬) 신부는 이듬해에 원평공소를 설립하고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다. 제9대 주임 최재선(崔再善) 신부는 교세 증가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40년 1월 김제·금산·수류 지역 회장과 유지들의 피정 때 각 지역별로 전교사 1명을 더 두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본당 신자 50여 명이 사망하였고 성당마저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류본당 관할 지역은 1951년부터 제13대 주임 김반석 신부가 부임해 오는 1960년 3월까지 김제본당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지역 신자들은 1959년 성당·사제관·수녀원을 건립하는 등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61년 4월 25일 교구의 지시에 따라 김반석 신부는 성당을 교통이 편리한 원평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66년 4월 8일 다시 수류로 환원되었는데, 이때 격하된 원평공소를 1977년 12월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금산면·봉남면·금구면·정읍군·옹동면 지역을 이관하였다. 1980년 6월에는 사제관이 신축되었다.

[활동사항]

수류성당은 1909년 신식 학교인 인명학교[해방 후 화율국민학교가 됨]를 세워 전라북도 지역에서 일찍부터 학문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제10대 주임 이약슬(李若瑟)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한편, 관내 유일의 국민학교였던 화율국민학교 학생들의 교육을 전담시킬 목적으로 1944년 8월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를 초청하였다. 한편 제15대 주임 권영균(權寧均) 신부 때는 가톨릭구제회의 지원으로 상화와 복호에 저수지 축조 사업을 벌여 극빈 신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고,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분원을 폐쇄한 지 30여 년 만인 1982년 3월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를 초청하였다. 1986년 3월에는 수류성당 내에 생필품구판장을 마련하여 그 이익금을 주일학교 후원금으로 사용하였다.

[현황]

2016년 현재 주임신부는 김관우 스테파노 신부이며, 신자수는 400명이다.

[의의와 평가]

수류성당의 성지로서의 가치는 성당에서 펼친 교육 사업과 공동체의 활성화와 빈한한 시절에 자신의 안위보다는 두터운 신앙심을 바탕으로 신도들이 100여 년 동안 꾸준히 교우촌을 형성하였다는 데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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