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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20101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염기를 빼는 게 일이었지]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1920년대 후반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갯벌을 막아 조성된 농토이다.

간척 사업으로 드넓은 농토는 형성되었지만 땅에는 염기[소금기]가 가득 배어 있어 바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조연식[1927년생]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논의 염기 때문에 동동거리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락이 크들 못 혔어. 간기가 수북했은게. 그게 눈으로 보여. 흙 위에 그 하얀 눈꽃 내린 것처럼 쫘악 깔려 있었어. 그런 땅에서 나락이 크겄어? 모판에서 자란 싱싱한 벼를 갖다 심어 놔도 빨갛게 타올라서 못 크는 거야. 자라다가 만 것투성이었어. 영글어서 벼알이 맺혔다고 해도 만져 보면 다 쭉정이야. 가물면 염기가 더 많이 올라와서 나락을 전혀 써먹들 못했지. 이게 간기가 많은 땅이 있고, 적은 땅이 있는데 순전 운이었어. 제비뽑기해서 땅을 받아먹었잖아. 배수가 가까운데 있는 논은 아무래도 간기가 적지. 그런데는 그래도 좀 잘 자랐어.”

이러니 농사를 지으려면 가장 먼저 염기를 제거해야 했다. 당시 사용한 보편적인 염기 제거 방법으로는 논에 물을 넣어 염기를 우려낸 후 배출하는 방법으로, 이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렇지만 염기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염기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아래의 3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실행했다고 한다.

[논에 대나무 묻기]

염기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행한 방법 중 하나는 땅 속에 대나무를 묻어 염기를 배수구로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대나무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가져왔다. 대나무는 5㎝ 크기로 전부 쪼갰다. 쪼개진 대나무를 지름 15㎝ 되는 원통 모양으로 묶어 한 뭉치씩 논에 묻었다. 1배미[0.4정보]의 논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70㎝ 정도의 깊이로 네 줄씩 묻었는데, 염기가 대나무를 타고 흙에 섞여 흘러 빨갛게 빠져 나왔다고 한다. 당시 묻었던 대나무는 1970년대에 제거했는데, 땅 속에 30여 년간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염기가 배어서인지 썩지 않았다고 한다.

[논둑에 배수구 파기]

염기를 제거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논둑에 배수구를 파는 것이었다. 이 배수구는 흙으로 만들어서 자주 무너졌으며, 그때마다 수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용수와 배수 사이 제렴구 설치]

이 외에도 염기를 제거하기 위해 제렴구를 설치했다. 제렴구는 용수와 배수 사이를 ‘ㄴ’자로 가르며 물길을 한 번 더 파는 것이었다. 제렴구를 설치해 놓으면 눈에 띄게 염기가 많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서서히 염기가 빠져서 제렴구를 설치하지 않은 논보다 염기 제거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간척지 땅이라고 해서 모든 땅이 같지는 않았다. 위치에 따라 염기가 많은 논이 있고, 적은 논이 있었다고 한다. 배수로 근처에 위치한 논은 물의 배출이 잘 되어 염기가 많이 빠졌지만, 배수로에서 먼 곳에 위치한 논은 상대적으로 염기가 많아서 농사가 잘 안 되었다. 이민자들은 제비뽑기로 땅을 결정했기 때문에 운에 따라 좋은 논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또한 땅의 위치에 따라 소출이 달라서 이민의 생활 정도도 달랐다고 한다.

광활면 지역은 지금도 땅을 1.5m만 파면 염기가 나온다. 지하수를 끌어올리면 짠물이 나와 식수나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예전처럼 염기로 인해 농사 피해가 많지는 않지만 물 관리에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최근에는 용수와 배수를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수로를 정비하고, 수문을 전기로 관리하고 있다.

[정보제공]

  • •  조연식(남, 1927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전 광활면장)
  • •  정치복(남, 1930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 •  조용환(남, 1935년생, 옥포리 화양1구 이장 겸 노인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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