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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20303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은 토지의 대부분이 농경지로 경지 정리가 잘 이루어져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대지에서 수행되는 작업들은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많은 농사일을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새로 출시되는 농기계는 김제시의 광활 지역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기계가 없으면 농사가 안 돼]

화양마을에 제일 처음 들어온 농기계는 수동식 도보 이앙기인 사조기였다. 당시 기계 이양을 시도한 농협조합장 안갑순 씨가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오면서 이앙기를 광활면에 들여왔다. 사조기는 휘발유를 넣어서 움직이며 모를 심는 기계였다. 기계 위에 모판을 올리고 사람이 걸어가면서 밀면 모가 한꺼번에 4줄씩 심어졌다. 모판에다 종자를 받아서 키우는 작업 역시 사조기를 통해 처음 시도되었는데, 당시 화양마을 사조기는 이순구[1931년생] 할아버지가 제일 처음 구입했다.

“내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사조기를 샀어.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게 언젠디. 그때 농협에서 외상 대출을 해줬어. 뭐 5년인가 이런 식으로 상환을 받는 거야. 그래서 조금씩 갚아 나가. 그렇게 해서 10년 동안 사조기 두 개를 써먹었지. 그게 쓰다 보면 낡고 못 써져서 바꿔 줘야 해. 구보다, 닛산 뭐 여러 이름이 있었어. 전부 일본 놈들 꺼지. 사조기 사고 이리농업시험장에 가서 교육받았어.

그때 우리 모판이라는 것도 처음 봤지. 원래 모판이라는 게 없었어. 모판에 모 심기, 모 키우기, 모판을 기계에 넣는 거, 조작법 이런 거 배웠어. 아, 그거 빠르더만. 한 필지에 모를 심으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사이에 한 필지를 끝내 버려. 사람들한테 돈 받고 대신 심어 주기도 했지. 한 필지에 2만 원씩 받았나.”

사조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손에 익숙지 않아 논두렁에 빠지기도 하고, 사람 손이 아닌 기계가 심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의 고령화로 인해 젊은 사람이 줄고 인력이 부족하게 되자 사용량이 점점 늘어났다.

사조기가 사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용이앙기가 나왔다. 승용이앙기는 사조기와 다르게 사람이 타고 움직일 수 있었으며 한꺼번에 6줄의 모가 심어졌다. 광활면에는 총 5대의 승용이앙기가 들어왔는데, 화양1구에서는 최성진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구입했다.

최성진 할아버지에 따르면, 당시 승용이앙기를 구입하자 일본에서 기술자들이 찾아와 기계 작동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승용이앙기는 사조기에 비해 쓰임이 더 편리하여 마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사조기보다 속도가 빨라 하루 종일 일을 하면 160배미의 논에 모를 심을 수 있었다. 최성진 할아버지는 한 필지당 4만 원[지금 시세로 10만 원] 정도의 돈을 받으며 마을 사람들의 논에 모를 심어 주기도 했단다.

[정보제공]

  • •  이순구(남, 1931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 •  최성진(남, 1936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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