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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C010101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희

[죽음으로 주인에 대한 충심을 보여 준 말]

내촌마을 홍산교회 맞은편에는 조그만 소나무 동산이 있다. 이 동산에는 마을 사람들이 말뫼동산이라고 부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민둥 묘 두 기가 있다.

이 말뫼동산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때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 곳곳이 전쟁터로 변하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백성이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이 되었다. 내촌마을에서도 용기 있는 선비가 아들과 함께 의병으로 출정을 했다. 모두 함양박씨 가문의 자손들이었다.

가족들은 걱정으로 매일 같이 정한수를 떠 놓고 무사 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입구에 쓰러질 듯 말 한 마리가 당도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제 몸 하나 가눌 수 없던 말의 입에는 무언가가 물려 있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박명수가 의병으로 나가면서 타고 갔던 말이었다. 그리고 말의 입에 물려 있던 것은 박명수의 옷자락으로 보이는 천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말은 이내 숨을 거두었다. 박씨 가문에서는 말이 물고 왔던 소맷자락은 찾을 수 없는 박씨의 시신을 대신해 문중의 선산에 묻었다. 그리고 주인에 대한 충심으로 마을까지 찾아온 말도 고이 묻어 주었다.

말과 말 위에 놓여 있던 안장이 문중 선산 맞은편에 있는 동산에 묻힌 이후, 말이 묻힌 곳은 말뫼동산, 문중의 선산은 소매자락을 묻었다고 하여 소매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부자의 충심으로 빛나는 가문]

소매동산에는 박명수의 의기(意氣)를 기리는 비석이 있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과 싸운 공을 기려 이조참판이란 벼슬까지 하사받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박명수의 가묘와 비석 뒤편으로는 아들 박준의 묘가 있다. 박준 역시 아버지 박명수와 함께 의병으로 웅치전투에 참가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함양박씨 종손인 박성균[1932년생] 할아버지는, 이렇게 박명수박준의 의병 봉기로 인해 가문의 명맥이 끊어질 뻔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함양박씨 문중의 선산은 박씨 가문의 것이라기보다 소매동산으로 더 유명하다. 박성균 할아버지는, 마을의 역사가 천 년 가까이 되었다고 해도 현재 해주오씨는 마을에 터를 잡고 산 흔적도 없는 대신 말뫼동산과 소매동산이 600~700년경 자신의 21대 조상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내촌마을의 상징으로 우뚝 서다]

한편, 주민들은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소매동산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소가 한참 논을 갈고 난 이후에 메어 놓고 쉬게 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말뫼동산 역시 어떤 주민들에게는 성황당이 있던 곳으로 더 기억되고 있는데, 이는 말의 충성심이 마을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으며 신성시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분순[1933년생] 할머니는 친정어머니가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그곳에 돌을 쌓으며 딸의 안녕을 빌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고 말했다.

과거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모르나 함양박씨 선조의 의로움이 전해지는 말뫼동산은 내촌마을의 상징 중 하나이다. 이 상징은 지금도 그 앞으로는 상여나 운구차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의 성스러움도 담고 있었다.

[정보제공]

  • •  박성균(남, 1932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큰뜸 주민)
  • •  김분순(여, 1933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웃몰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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