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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C020103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해수

김제(金提)라는 지명을 풀이하면 ‘황금을 캐내는 둑’이라고 한다. 여기서 황금은 노랗게 황금색으로 일렁이는 추수기의 벼이삭을 의미한다. 만경(萬頃)이란 말 또한 1만 이랑의 드넓은 평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부터 부르는 ‘징게 맹갱 외얏밋[외배미] 들’은 ‘황금이 노랗게 일렁이며 끝없이 하나로 이어진 너른들’이라 풀이할 수 있다.

기름진 옥토와 따듯하고 비가 많은 기후 등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지역은 벼농사에 적합하여 삼한시대 이전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4세기경 유적으로 추정되는 부안 소산리에서 출토된 볍씨자국의 토기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벽골제의 힘]

김제 도작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유산으로는 김제시에서 5㎞ 정도 떨어진 부량면에 위치한 벽골제가 유명하다. 벽골제라는 지명도 ‘벼 고을의 둑’으로서 농사에 필요한 관개 시설의 역할을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벽골제는 과거 김제평야 거의 전 면적이 농수를 공급받는 몽리 지역에 해당할 정도로 규모가 컸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목적 댐으로써 서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장성으로,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논산까지 이어지는 국도로서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기에 벽골제와 관련하여 “결해이사금 21년 시개벽골지 안장 1,800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AD 300년에 해당하는 백제 비류왕 27년인데, 백제에 관한 고사를 통일신라시대의 후대 사가들이 신라 기년으로 고친 것이다.

예부터 이 지역을 지칭하던 ‘벽골(碧骨)’은 AD 757년인 통일신라시대에 ‘김제(金提)’로 개칭되었다.

우리나라 농경 사상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벽골제를 축조함으로써 백제는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고 당시 하천의 자연 환경에 의존하던 부족국가들을 흡수하였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멀리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서 백제 문화를 전파하기에 이른다.

문헌에 의하면 벽골제 제방의 길이는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장 7.196척,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제지장(堤之長) 60,843척,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장 2,600보로 기록되어 있다. 1975년 전, 부여박물관장을 역임한 홍사준 씨가 벽골제 발굴 작업을 수행할 때 권척으로 제방을 실측한 결과 약 3,300m에 달하는 방대한 길이었다.[『김제시사』] 이는 옛 문헌 기록들에서 나타나 있는 수치와 비슷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다만 현재는 3㎞ 정도의 제방둑과 수문이었던 ‘장생거’와 ‘경장거’의 흔적만 남아 있어 과거의 방대한 규모를 육안으로는 찾아볼 수 없다.

[「논 이야기」로 보는 농토 착취의 시대]

오래전부터 내촌마을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김제문화원에서 발간된 『우리 고장의 옛 지명』에도 나와 있다. 그런 기록을 뒷받침만 할 증거로 예전부터 밭을 일구면 여기저기서 그릇조각들이 나왔고 지금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장구한 세월 주민들이 지어 오던 마을 논들이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1868년부터로, 일본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호남평야의 옥토를 사들였다.

일제가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일부의 지주와 자본가들이 고리대금업으로 농민 경제를 뒤흔들었다. 예를 들어 땅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준 후 정한 기일에 찾아가도 집을 비워 고의로 만나 주지 않았다. 그렇게 기일을 넘기고 난 후 일부 일본인들은 계약서의 적법성을 들어 하소연할 곳 없는 농민들의 농토를 착취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논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고발을 주제로 하고 있는 채만식의 소설 「논 이야기」는 시대적 상황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농민이 논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땅을 빼앗긴다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박탈당하는 것과 같다. 농민들이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에 걸었던 기대는 토지를 되찾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이러한 꿈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립된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한 지주 세력의 기득권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한생원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당시 현실을 거침없이 고발하고 있다.

“일없네.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길 삼십육 년두 나라 없이 살아왔을려드냐. 아니 글쎄 나라가 있으면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 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구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구 살지. 독립이 됐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한 땅 뺏어서 팔아 먹는 게 나라 명색야? 독립됐다구 했을제 만세 안 부르기 잘했지.”

이 소설에서 보이는 논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농민들의 가장 절박한 생존 문제가 해방 이후에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정보제공]

  • •  이두영(남, 1931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웃몰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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