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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C020105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해수

정판규[1921년생] 할아버지는 “이제 늙어 눈이 아른거려 잘 보이지 않고 기력도 없어 말을 계속하면 힘이 든다.”면서도 살아온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일제강점기 그는 농사일을 해도 일본 사람들이 다 뺏어 가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이 시기에 일본 사람들은 안하무인으로, 마을 주민들을 마치 종 부리듯이 했다고 한다. 행여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멈춰서 인사를 해야 했는데, 만약 그렇지 않으면 뻣뻣하다고 발길질을 해대며 갖은 트집을 잡고 소작을 그만두라고 위협을 했다. 먹을거리가 없어서 자기가 농사짓는 논에서 일본인 지주나 논을 관리하는 마름의 허락 없이 곡식을 조금이라도 가져가다 들키는 날에는 영락없이 논을 붙여먹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했단다.

[살려고 남의 묘 속에 들어갔지]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제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쌀은 물론 놋그릇까지도 모두 빼앗아 갔다. 이 시기에는 대동아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았던 때인지라, 다급해진 일본은 부역을 위한 조선인 노무자들을 대대적으로 착출하였는데, 대부분 나이 20~30세 청장년들이 강제 노역자로 끌려갔다.

일본인들에게 한 번 붙잡혀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고 판단한 정판규 할아버지는 동네 친구 강씨와 피신을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인근 말뫼동[말뫼동산] 근처 대여섯 기가 모셔져 있는 뫼똥 하나에 굴을 파고 들어가 두어 달 이상을 숨어 지냈다.

두 사람은 행여나 들킬세라 동네 사람들도 모르게 숨구멍만 터놓은 묘 안에서 한 바가지의 생쌀로 열흘 이상을 씹어 먹으며 버텨내었다.

정판규 할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암울하던 당시를 회상하였다. 좁은 굴속에 젊은 두 사람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들어앉아만 있자니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이대로 남의 무덤의 송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리고 친구 강씨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보자고 서로 위로하면서 지내다가 남의 무덤 속에서 해방을 맞았다.

예전에 성황당과 당산나무가 있었다는 그 말뫼동은 현재 개간이 되어 정판규 할아버지가 숨어 있던 묘들도 사라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묘 한 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꽃밭에서 호강하지 뭐]

과거 남의 무덤 안에서 피신하며 고생했던 정판규 할아버지는 현재 마당이 넓은 집에 살면서 울안의 텃밭 가득 여러 가지 채소와 과수나무들을 많이 가꾸고 있다.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내외가 가져다 심은 나무와 꽃이 20여 종이 넘는다. 그래서 봄이 되면 집안 가득 온통 꽃들이 피어서 “그 전에는 뫼똥 속으서도 살았지만 시방은 꽃밭에서 산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소년은 꿈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으며 산다.”는 말은 때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정판규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과거는 집안 가득 피어나는 형형색색의 꽃들로 위안을 삼지만, 평생 동안 삶의 보람으로 여기며 지은 자식농사는 자주 찾는 자식이 없어 쓸쓸한 추억이 되어 가고 있다. 내외 모두 아흔 살을 바라보는 고령인데도 농기계 등을 보관하는 헛간에는 여전히 호미며 괭이, 망태 등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보제공]

  • •  정판규(남, 1921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재너머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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