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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C030104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선희

“안우상이 만나 봤어? 우리 동네서는 안우상이가 유명혀. 그 집 얘기를 들어 봐야 한다니까 그러네.”

내촌마을 이야기를 듣고자 주민들을 만나던 중 김분순[1933년생] 할머니가 우리에게 ‘안우상이란 인물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권유했다. 안우상? 우리는 처음에 안우상이란 인물이 남성인 줄 알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조사를 다니면서 할머니[여성]들 이야기에 집중해 왔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김분순 할머니가, “그 집 시어머니랑 안우상이랑 같이 애 낳고 산 얘기 들으면 재밌을 거여. 3대가 같이 살았응께.” 하고 말했다. 그제야 안우상이란 사람이 여성이란 것을 깨달았고,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김분순 할머니가 그렇게 권유하는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마을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해 동끝네라고 불리는 안우상 할머니 집으로 걸음을 옮겼고, 마친 집 앞 비닐하우스에서 콩을 고르고 있는 안우상[1935년생]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죽산에서 우리 집 식구가 젤루 많았어]

안우상 할머니는 스물한 살 때 병상에 누워 있던 친정아버지의 뜻을 따라 남편 얼굴도 안 보고 내촌으로 시집을 왔다.

그런데 시집을 와서 보니, 층층시하라고 했던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와 38세의 시아버지, 40세의 시어머니까지 어른들은 물론이고 여섯 명의 시동생까지 결혼과 함께 ‘시’자 붙는 사람이 족히 10명은 넘었다. 거기에 집안일을 봐 주는 식솔 2명을 더해 맏며느리로서 안우상 할머니가 챙겨야 할 식구가 12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식구는 곧 스무 명 넘게 불어났다. 안우상 할머니의 6남매 아이들과 시누이 1명, 작은집[남편의 작은아버지 집] 어른들이 일찍 죽어서 거두게 된 사촌들까지 세월에 따라 식구가 늘고 불고를 거듭해서 족히 20명은 넘었던 것이다.

여자 입장에서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맏며느리로서 그녀는 이 대식구의 끼니와 빨래, 청소 등 가사 일을 책임져야 했는데, 식구가 많다 보니 끼니마다 차려야 하는 밥상의 규모와 빨랫감도 어마어마했다. 매일 끼니와 일꾼들 새참 챙기는 중간 중간에 시간을 쪼개어 빨래도 해야 했고, 밥 짓는 데 쓸 보리와 콩을 빻고 고르는 일도 직접 해야 했다. 천성적으로 일을 마다하지 않는 할머니 본인의 성격과 또 워낙에 일하기를 내켜 하지 않는 식구들로 인해 집 안팎의 일은 혼자 도맡다시피 했다고 한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어]

안우상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부터 10여 년간 집안에서는 아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결혼 당시 두 살이었던 시누이를 시작으로 그녀와 시어머니가 7명의 아이를 내리 낳았기 때문이다.

결혼 1년 뒤인 1956년 아들을 출산한 안우상 할머니는 2년 뒤 딸도 출산한다. 어린 시누이부터 자신의 아이들까지 내리 몇 년 간 집안에 아이들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터라, 그녀는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남편 박선균[1934년생, 호적상 1937년생]의 늦은 군 입대와 함께 아이 소리가 좀 끊기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막내 시누이를 출산하였다. 시어머니가 노산으로 젖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직접 갓 난 시누이에게 자신의 젖을 주었다. 시누이에 대한 육아도 그녀 몫이었던 것이다.

결혼과 함께 어린 시누이를 키웠기에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이가 넷이나 되니 집 밖을 나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안우상 할머니가 그렇게 고생하면서 키운 시누이들은 이제 딸과 다름없다. 또한 시누이들에게도 올케언니에 대한 고마움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심과도 같다. 특히, 중풍과 지병으로 오랜 세월 병상에 있다 돌아가신 시부모에 대한 지극정성을 지켜봐 왔던 시누이들은 정말 깍듯하게 안우상 할머니를 챙긴단다.

안우상 할머니는 막내 시누이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계모임을 통해 해마나 여행도 다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얼굴을 보고, 상시로 전화 안부를 물어 주는 시누이들이 그녀는 참 고맙다고 말했다.

[시동생들 챙기느라 아들 도시락도 못 싸줬어]

안우상 할머니의 큰아들과 큰딸은 자신들보다 나이 어린 고모를 두었다. ‘애기고모’라 칭하며 대우는 해줬지만 고만고만한 나이기에 다투는 일이 없었을 리 만무했다. 어쩌다 막내 시누이랑 애들이 다퉈 시누이가 울기라도 하면 큰아들은 머리통이 남아나질 않았다. 어김없이 어른들과 시동생들로부터 혼쭐이 났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 시누이들로 인해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에 안우상 할머니는 늘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후 첫 소풍을 가던 날, 시동생들 먼저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느라 정작 큰아들 소풍 도시락도 못 싸 줄 상황이었다.

지금 같으면 시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당숙 집으로 달려간 그녀는 오래된 도시락을 빌렸다. 구석진 곳에서 겨우 찾아낸 낡아빠진 도시락을 닦고 또 닦았다. 도시락에 채울 수 있었던 것은 겨우 밥하고 김치 정도. 미안한 엄마의 마음까지 담아 도시락을 싸서 밖으로 나가 보니 이미 아들은 학교로 떠나고 없었다.

애타게 뛰어나가 걸어가는 아들을 불러 세우고 보니, 아들이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또래보다 어려서 늘 걱정이었던 아들의 첫 소풍이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처음 가는 소풍에 도시락마저 없으니 얼마나 서러웠을까? 어머니의 부름에 뒤돌아 본 아들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도시락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미안함도 그대로란다.

어찌 아들에 대한 미안함뿐이겠는가? 안우상 할머니의 큰딸 역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부뚜막에서 제대로 안지도 못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그녀의 집에서는 식구가 많아 끼니마다 6개의 상을 차려야 했다. 어디 거기서 끝이겠는가? 물 달라 뭐 달라, 식구들 밥상 수발을 들다 보면 손이 모자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큰딸이 옆에서 항상 도와주다 보니 제대로 앉아 밥도 못 먹고 학교에 늦는 게 일쑤였다고 한다.

안우상 할머니는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대가족의 맏며느리였던 자신을 어미로 두어서,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고 자란 자녀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로서 안우상 할머니는 여전히 40여 년 전 아이들을 마음껏 돌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가슴 깊이 박혀 있었다.

[정보제공]

  • •  김분순(여, 1933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웃몰 주민)
  • •  안우상(여, 1935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웃몰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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