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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해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64
한자 津浦海戰
영어의미역 Jinpo Naval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백덕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380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380년
발생(시작)장소 진포
관련인물/단체 나세|심덕부|최무선|이성계

[정의]

고려 말 만경현에 속한 선유도를 기지로 삼아 왜구를 크게 물리친 해상 전투.

[개설]

1380년(우왕 6) 8월 왜구는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라북도 금강 하류 진포를 거점으로 내륙으로 침입하였다. 당시 고려는 최무선(崔茂宣)[1325~1395]이 발명한 화포를 주무기로 효과적인 대응을 하였는데, 이때 해전 기지로 삼은 곳이 당시 만경현에 속해 있던 고군산군도의 선유도였다. 이 전투에서 왜구의 배 500여 척을 불사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역사적 배경]

왜구가 고려에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다. 이로부터 5년에 걸쳐 왜구가 7차례나 경상도, 전라도 해안 지역을 노략질했지만, 그 뒤 100여 년 동안은 10여 차례 침입하는 데 그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친 고려와 원연합군의 일본 정벌도 왜구 침입을 뜸하게 만든 한 원인이었다.

왜구의 노략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350년(충정왕 2)으로, 뒤이은 공민왕 때에는 115회, 우왕 대[1375~1388]에는 278회의 침입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14세기 후반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5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몰려오는 등 그 규모도 커졌고, 노략질하는 지역도 남부 해안에 그치지 않고 평안도, 함경도 등 전국에 걸쳤다.

고려는 왜구가 창궐하자 이를 물리칠 화기를 제조하기 위하여 화약 제조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는데, 최무선은 원나라 이원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워왔고, 조정에서 이를 기반으로 1377년(우왕 3)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을 만들게 하였다.

[발단]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이 절정을 이루어, 바다에서 조운선의 곡물을 약탈하거나 해안 지역에 있는 조운 창고의 곡물과 군현의 관아 또는 부잣집의 재물을 노략질했으며, 내륙 여러 지역을 횡행하면서 민가를 노략질하고 주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 해쳐서 큰 피해를 입혔다.

우왕 때 왜구가 이같이 창궐한 것은 1333~1392년에 일본의 왕조가 남북으로 갈라져 전란이 지속됨에 따라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정벌한 바 있는 규슈와 그 주변의 쓰시마 등 섬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가장 곤궁하여, 고려와 중국 해안 지역을 노략질한 해적 무리는 거의 이 지역 출신이었다.

[경과]

1380년 8월 왜구들은 500여 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오늘날의 금강 어구에 해당하는 진포구에 침입하였다. 그들은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하여 묶어 놓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한 다음에 대부대를 거느리고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심덕부(沈德符),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진포로 파견하여 전함 100여 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진압하게 하였다. 이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장항읍에는 ‘상원수 나세’에서 유래한 ‘원수리’라는 지명이 실재하는 구전설화가 있고, 나세의 후손들이 충청남도 서천군과 장항읍 일대에 살고 있으며, 서천군 옥서리에 나세 장군의 가묘가 있다고 전해진다.

[결과]

상호 결박한 왜선 500여 척이 화포에 불타자 갈 곳이 없게 된 3만 명의 왜구 중 360여 명이 옥주[지금의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는데, 타고 온 선박을 소실당하여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 영동, 옥주 등지로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잔당은 그 해 9월 여러 지역에서 쫓기는 왜구들과 연통하여 남원 운봉에 재집결하였으나 이성계의 황산대첩에서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금강에서 대첩을 거두고 돌아오자 우왕은 연회를 베풀어 개선을 축하해 주었으며 참전한 장수들에게는 벼슬을 올려주고 선물을 하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포해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통, 화포 등 화약병기를 갖추고 출전한 전투로, 이를 왜구의 토벌에 이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전투 역사상 큰 의의가 있다. 이 승리를 계기로 하여 왜구의 침입이 점차 수그러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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