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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766
한자 洪啓禧
영어음역 Hong Gyehui
이칭/별칭 순보(純甫),담와(淡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승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유학자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
성별
생년 1703년연표보기
몰년 1771년연표보기
본관 남양
대표관직 판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김제 출신의 문신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 증조할아버지는 홍처심(洪處深)이고, 할아버지는 홍수진(洪受晋)이며,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홍우전(洪禹傳), 어머니는 대사헌을 지낸 이상(李翔)의 딸이다.

[활동사항]

홍계희(洪啓禧)는 지금의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에서 태어났는데, 기록에 보면 “몽산이 맑고 깨끗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데 홍계희가 태어난 해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홍계희는 어린 시절을 만경과 고산, 전주 일원에서 보내다가 1725년(영조 1) 23세 때 전주향교에서 치르는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 해 김제 금산사 환성대사 집회에 참가하였고, 1726년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728년(영조 4) 아버지 홍우전이 죽고, 1737년(영조 13)에 어머니 우봉이씨가 죽자 주로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여 정언이 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교리로 특진하였다. 이어 수찬을 거쳐, 1742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파견되어 함경도의 진휼 정책을 살폈다. 이듬해 다시 북도별견어사로 파견되었는데, 이 때 그 지방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하여 복명해 영조의 칭찬을 받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공조참의가 되었으나 1743년 부사과로 있으면서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정 혐의를 탄핵했다가, 당색으로 공격했다는 의심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다시 승지로 특채되었다. 1748년 일본 막부의 9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상사(通信上使)로 뽑혀 부사 남태기(南泰耆), 서장관 조명채(曺命采) 등 일행 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형조참판이 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청으로 비변사당상을 겸하였다.

1749년 충청도관찰사 때 시무의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이 때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 제정을 주관해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 시행하였다. 그러나 균역법이 시행상 문제가 많다는 중신들의 비난을 받고 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광주유수로 전출되었다. 1754년 이조판서로 재기용된 이후, 형조·병조·호조의 판서 및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762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잘못을 고변하여 결국 세자가 죽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학문과 사상]

홍계희는 평소 자신을 유학자로 자처했으나 그보다는 시무에 밝고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많은 관심을 보인 개혁 실천주의자였다. 이는 그가 젊어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고 유형원(柳馨遠)의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 여겨진다. 그의 개혁관은 1749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며 올린 시폐 개혁안에 잘 나타나 있다.

홍계희는 또한 노론 이재(李縡)의 문인을 자처했으나, 대다수 이재의 문인들로부터는 배척을 당하였다. 한때는 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김재로(金在魯) 등 탕평파에 접근해 출세했으나, 후일 조현명 등과 불화하면서 멀어졌다. 그 대신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형조판서 윤급(尹汲), 참판 이기경(李基敬) 등과 결탁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삼운성휘(三韻聲彙)』가 있고, 편저로 『균역사실(均役事實)』·『준천사실(濬川事實)』·『균역사목변통사의(均役事目變通事宜)』·『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해동악장(海東樂章)』·『명사강목(明史綱目)』·『경세지장(經世指掌)』·『문산선생상전(文山先生詳傳)』·『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사곡록(寺谷錄)』·『창상록(滄桑錄)』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일산리 산2-1번지[곡현로847번길 17-8]에 있는데, 현재 용인시 향토유적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가 문간(文簡)이었으나, 손자들이 정조 시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일가가 처형을 당하자,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충청도 유생들이 이재의 뇌암서재(雷巖書齋)에 배향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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