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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767
한자 鄭汝立
영어음역 Jeong Yeorip
이칭/별칭 인백(仁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사상가
출신지 전라북도 전주시
성별
생년 1546년연표보기
몰년 1589년연표보기
본관 동래
대표관직 홍문관수찬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아버지는 첨정(僉正)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활동사항]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1570년(선조 3)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이 되었고, 1585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를 버리고 박순(朴淳)·성혼을 비판하여 서인의 미움을 받고 선조의 신망을 잃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뒤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1587년(선조 20) 왜선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하였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을 받아 대동계를 동원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이후 대동계 조직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과 모사(謀士)가 모였다.

1589년(선조 22) 이들의 움직임이 노출되자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연명으로 한강이 얼어붙으면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가고 자객을 보내어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여 병권을 장악하며, 인근의 수령·병사·수사를 죽이고 언관을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킨 다음 궐기하기로 하였다고 고변하였다.

이 일로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고, 정여립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 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정여립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여 처리하면서 정언신(鄭彦信)·이발(李潑) 등 동인의 주요 인물이 대거 숙청되는 기축옥사로 이어졌다.

[학문과 사상]

정여립은 주자(朱子) 사관(史觀)이 정통으로 여겨지던 조선 사회에서 주자 사관과 배치되는 사마광(司馬光) 사관을 찬양하였고,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라고 설파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관 및 절대 군주를 부정했으며, 주자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정여립의 사상은 주류에서 이탈하여 고루한 고정 관념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사상이었으나 조선의 사상계를 주자 성리학 중심으로 이끌어 가려는 세력에게는 매우 불온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여립의 사상은 성리학의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실천 행위, 즉 민생 문제 해결에 더욱 비중을 둔 것이었다. 또 대동계 조직 때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인물들을 적극 수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분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병법에 대해서도 꽤 조예가 깊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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