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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846
한자 李廷臣
영어음역 Yi Jeongsin
이칭/별칭 공보(公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성별
생년 1559년연표보기
몰년 1627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관직 광주목사|원주목사

[정의]

조선 전기 김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보(公輔). 증조부는 종실 오성수(烏城守) 이신손(李神孫)이고 할아버지는 풍양령(豊陽令) 이춘(李春)이며, 아버지는 이몽상(李夢祥), 어머니는 남상덕(南尙德)의 딸이다. 아들은 이응명(李應蓂)·이응협(李應浹)·이응시(李應蓍)이다.

[활동사항]

이정신(李廷臣)은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정언, 이듬해 헌납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의 침입을 받게 했다 하여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책임을 추궁, 파직시켰으며 선조를 영변까지 호종(扈從)하였다.

임실현감인 아버지 이몽상이 전라도관찰사 이광전(李光殿)의 후장(後將)으로 진중에 있음을 듣고 아버지 곁에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1594년 선천군수에 이어 광주목사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병에게 남원성이 함락되자 이정신은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방어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고 대처하였다.

이후 순천에 파견되어 주둔 중인 명나라 군대의 군량이 끊어지자 전라도 광주에 있던 곡식 수백 석을 내어 수송하였다. 이에 감탄한 명나라 장수가 이런 사실을 조정에 아뢰니, 선조가 의복을 하사하였다. 명군이 철수하기 위해 수개월 간 광주 본영에 머물 때에도 이들을 한결같이 접대하여, 그 공으로 다시 구마(廐馬)[왕궁 안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기르며 왕이 거둥할 때 사용하는 말]가 하사되었다. 난이 진정된 후, 광주목사로서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善政)하였다 하여 1598년 전주부윤에 영전하였다.

1600년 해임된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을 지나치게 공박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 북도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서 나주목사·광주목사·용양위호군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12년 의주부윤으로 재직 중 다시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고 1615년 사은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은(銀)의 채광 임무가 막중한데도 단천군수가 되어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뒤에 경기감사에 임명되었다가 찰리사(察里使)로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사를 시찰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호군(護軍)으로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뒤에 원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5.25 내용 수정 [가계] 아들은 이응시(李應蓍)이다. → 아들은 이응명(李應蓂)·이응협(李應浹)·이응시(李應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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