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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852
한자 任瑋
영어음역 Im Wi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성별
본관 풍천(豊川)
대표관직 현감

[정의]

조선 전기 김제 출신의 문신.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한 전쟁이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나 임진왜란이라 부르고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임진왜란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이와 맞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이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하였는데, 송상현(宋相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충주에까지 들어갔다.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 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충주의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피난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백관들은 권정례(權停例)로써 진하(陳賀)하였다.

왕은 사관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版)을 받들고 먼저 떠나게 하고 왕은 융복(戎服)으로 고쳐 입고 세자 광해군, 왕세자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 그리고 왕비 등과 함께 도성을 떠나 3일을 걸려 개성에 도착하였다.

출성 당시 100여 명이 호종하던 관원이 3일 사이에 상당히 줄어들어 개성까지 따라온 사람만으로 관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어 관직의 변동도 많았다.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옮겼으며,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가계]

본관은 풍천(豊川). 이조판서를 역임한 임중선(任中善)의 현손이다.

[활동사항]

임위(任瑋)는 지금의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에서 태어났으며,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난길에 오르자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종하여 용만[평안북도 의주시의 옛 별호]에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05년 발급된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 전하는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된 사람들에게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공신 증서이다. 선무원종공신은 1604년(선조 37) 이루어진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9,060명을 녹훈한 것이며, 문서도 이때 발급되었다. 첫머리에 문서의 명칭이 있고, 문서를 발급받는 개인의 신분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다음에는 선조가 공신도감에 내린 선무원종공신 녹훈의 전지(傳旨)를 실었다. 여기에는 3등공신까지의 명단과 신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종친으로부터 노비까지 모든 계층이 망라되어 있다. 각 등급의 공신 명단 끝에는 이들에게 내리는 특권이 기재되어 있다. 각 등급의 공신에게는 관직을 한 계급씩 올려 주고 그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을 주게 하였고, 그 부모에게는 봉작(奉爵)하고 죽은 자에게는 추증하며, 기왕의 범죄는 탕감하고 노비들은 면천(免賤)하여 양민이 되게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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