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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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he Story of Buyeo's Tre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행묵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 살아 있는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전설 이야기.
[개설]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는 부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과 함께하거나 나무 자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나무들이 많다. 그러한 나무들을 살펴보면서 부여 지역의 역사와 전설을 알아보자.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나무]
백제 시대를 함께한 부여의 터줏대감으로서 내산면 주암리의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가 있다. 1982년 11월 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는 나즈막한 야산의 남쪽 입구 쪽 확 트인 넓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가 자리 잡은 일대가 백제 시대에는 역사적·군사적 의미가 있던 곳이었음을 전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남쪽으로는 서천군의 건지산성이 있고, 가까이에는 가림성이 있다. 부여에서 금강 하구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요충지인 셈이다.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는 1,500여 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며, 높이는 23m, 둘레는 8.6m에 이른다. 1916년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높이가 34m나 되었다고 하며 1980년대까지도 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파리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는 538년(백제 성왕 16) 사비 천도를 전후하여 좌평 맹씨가 심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또한 고려 말에는 산 너머 은산면 각대리에 있던 숭각사 주지가 암자를 중수할 때 대들보로 쓰려고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큰 가지 하나를 베어 가다가 돌연사하였고, 절도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10년 소들에게 돌림병이 들어 떼죽음을 당할 때 주암리 마을은 무사하여 인근 마을에서 소떼를 몰고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를 한바퀴 돌기도 하였다. 해마다 음력 1월 2일이 되면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며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주암리 행단제(杏亶祭)를 지낸다.
외산면 수신리에는 부챗살 줄기에 얹힌 수관처럼 아름다운 부여수신리반송이 있다. 원래 반송은 아름다운 모양새 때문에 옛날부터 선비들이 좋아하던 나무라고 한다. 부여수신리반송은 저수지 아래 논의 건너편 산자락 급경사지에 자라는데, 부여수신리반송에 관련된 유래나 전설은 알려진 바 없으나 소유주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오랫동안 관리하고 있다. 2002년 1월 10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약 400여 년이 된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들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심은 나무로 보인다. 줄기 밑 부분에서 8개의 줄기로 갈라져 부챗살 모양으로 가지가 펼쳐진 것이 특징이다. 줄기의 뻗음이 고르고 가지가 발달하여 아랫쪽의 거북 모양 껍질과 위쪽 가지들의 붉은색이 강하여 반송 중에도 특별히 아름다운 나무로 알려져 있다.
홍산면 북촌리의 부여 홍산객사 은행나무는 지금도 언제나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2019년 12월 2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600~800년 사이에 해당한다. 홍산객사는 전국에 얼마 남지 않은 객사 중 상당히 크고 원형도 잘 보전되어 있다. 객사 건물 왼편에 있는 부여 홍산객사 은행나무는 수령으로 계산하면 고려 후기 이후에 같은 자리에 계속 있던 셈으로, 나이만큼의 위용을 자랑한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나무 밑에 큰 구렁이가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신성시하였으며, 나라에 전쟁을 비롯한 재난이나 경사가 생기면 나무가 울기도 하고 밤에 불빛이 환하게 일어나기도 한다고 한다.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나무로서 주민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정월대보름에는 제사를 올리는 당산나무의 기능도 하였다.
규암면 진변리 백강마을 부산서원(浮山書院) 앞에는 청나라 심양에서 몰래 들여왔다는 부여동매가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원래 매화는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다 하여 옛 선비들이 가장 아끼는 꽃나무로서 고아한 품격을 갖춘 동양의 꽃으로 여겨져 왔다. 부여동매는 전하는 이야기로는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가 청나라에 갔다가 심양에 억류되었는데 추운 겨울의 눈발 속에 꽃이 핀 매화나무를 보고 크게 감동받아 조선으로 돌아올 때 나무를 파내어 가져와서 심었다고 한다. 수령이 4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방 직후에 갑자기 나무가 죽어 아들 나무를 옮겨 심었고 아들 나무도 1985년에 죽어, 지금의 부여동매는 당시의 규암면장이 새로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
홍산면 교원리에는 홍산향교 은행나무가 있다. 1979년 4월 1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수령은 약 540년이다. 홍산향교는 조선 시대 홍산 지역의 지방 교육을 담당하던 교육 기관이다. 향교의 뒷편에 자리잡은 대성전 동쪽 담장 밖에는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서쪽 담장 밖에는 은행나무보다 조금 작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자란다. 모두 향교에 의미가 있는 나무들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으로 구성된 건물 전체를 고목 세 그루가 에워싸고 있어서 고풍스러움과 품위를 한층 더하고 있다. 향교를 지을 당시 행단을 나타내는 은행나무와 괴시에 해당하는 느티나무를 심어 학문에 정진하는 곳임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은산면 은산리에는 500년간 굿거리를 지켜본 하당굿터 느티나무가 있다. 1982년 11월 1일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약 510년이다. 은산리는 은산별신제로 유명한 곳이다. 별신제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굿판을 펼치는 행사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원혼을 달래는 별신제를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은산리 북쪽 자그마한 야산이 당산이고 산자락에 은산별신당이 있다. 하당굿터 느티나무 앞은 은산별신제의 마무리 굿판이 신나게 벌어지는 장소이다. 굿판이 벌어지면 구경꾼들은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걸터앉아 있어서 멀리서는 과일이 매달린 것 같은 모습으로 행사를 관람한다. 그래서 느티나무의 모습은 상처 투성이라고 한다.
석성면 석성리에는 선비들이 가까이 두고 즐겼던 석성동헌 탱자나무가 있다. 1979년 4월 1일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약 410년이다. 지금의 석성동헌은 1628년(인조 6)에 지어진 것이다. 대개 동헌의 널찍한 마당 한구석에는 느티나무나 회화나무 혹은 소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석성동헌에는 엉뚱하게도 탱자나무가 서 있다. 땅에 맞닿은 줄기의 뿌리목 둘레가 거의 한 아름에 이른다. 탱자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나무이다. 탱자나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시나무의 대표 나무로, 죄인을 집 안에만 가둘 때 집 주위에 탱자나무를 빙 둘러 심는다. 그러므로 탱자나무가 관아 건물 내에 있는 것은 드물다.
임천면 군사리에는 사라진 임천관아를 지금도 지키고 있는 군사리관아터 소나무가 있다. 1979년 8월 7일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약 360년이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임천관아의 흔적은 면사무소 앞마당 한편에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뿐이다. 나무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되고 전체적인 모습은 보통 소나무일 뿐이다. 나이에 비하여 키가 아주 작고, 줄기와 가지가 모두 비틀어져 있어서 지금까지의 삶이 편안하지 않았음을 말하여 준다. 소나무 부근에는 죄인을 잡아다 곤장질을 하던 형청이 있다.
장암면 점상리에는 조신(趙愼)의 묘 돌배나무가 있다. 2013년 10월 11일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약 210년이다. 조신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원래 이름은 조사렴(趙思廉)이었다. 공민왕 때 신돈의 등장으로 조정이 어려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부여 임천에 숨어 지내면서 이름을 ‘조신’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와 가까운 사이였다.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스승이기도 하여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조신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하였다고 한다. 돌배나무는 상석이 놓인 제단 아래 빈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4월 중순 무렵 꽃이 만개하면 돌배나무 일대의 풍광은 옛 사람들의 시조가 생각날 만큼 경관이 빼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내산면 지티리에는 모자람을 채워 주는 비보(裨補) 숲의 나무인 괴목정 느티나무가 있다. 1979년 4월 3일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약 540년이다. 지티리는 지티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평범한 시골 마을이 아니라 괴목정 노신제라는 민속신앙이 지금까지 전하여 내려오는 마을이다. 노신제는 괴목정의 마을 숲에서 느티나무를 대상으로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마을의 안녕을 빌며 올리는 제사이다. 괴목정은 느티나무에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뜻이다. 괴목정 앞에는 들이 펼쳐지고 동쪽으로 삼태기 모양의 지형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풍수상 마을의 복이 쉽게 빠져나가는 형세라, 이를 막으려고 비보 숲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숲은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전통 숲에 어울리지 않는 아까시나무 두 그루가 느티나무와 함께 옛 정자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마을회관을 감싸고 있어 옛 흔적을 겨우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문화유산과 함께한 숲 나무]
부여읍 쌍북리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어울리는 부여 부소산성 숲이 있다. ‘부소’는 백제어로 소나무라는 뜻이 있다고 하니, 부소산은 옛부터 소나무가 많은 산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정남향이면서 땅이 척박한 이런 곳에는 생태적으로 소나무가 많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소나무는 부여 부소산성 안에서 가장 흔한 나무이다. 부소산 둘레길에는 단풍나무를 심고 가꾸고 있는데, 백제 궁궐의 옛 나무를 복원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그러나 너무 많아 경건한 느낌을 들지 않는다. 영일루 주변에는 소나무, 단풍나무, 복자기나무가 많고 벚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고욤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다. 유람선 나루터 근처는 급경사 길이 있다. 바위가 노출되어 있고 길 이외는 사람이 들어가기도 어려우므로 자연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예부터 자라던 나무들이 대를 이어 준 덕분에 백제 시대 나무의 자손들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인조목 울타리 인접한 거의 두 아름에 이르는 소나무 고목 한 그루가 있다. 부소산의 터줏대감이다.
규암면 규암리에는 옛 정취를 간직한 채 자리를 지키는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수북정이 있다. 수북정은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金興國)이 규암리 입구 산봉오리에 건립한 정자로,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김흥국이 수북정을 짓고 친구인 신흠(申欽)에게 부탁하여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 「수북정 팔경」이 전해진다. 현재 수북정은 부여 8경의 하나로, 수북정을 둘러싼 작은 숲이 옛 정취를 간직한 채 자리 잡고 있어 백마강의 빼어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400여 년전 수북정 일대에는 굵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았으나 지금은 얼마 되지 않는 소나무가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외산면 만수리에는 아늑한 숲속에 무량사(無量寺)가 있다. 무량사는 부여를 대표하는 사찰이자 부여 무량사 극락전을 비롯한 국가유산 보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만수산이라는 제법 높은 산줄기가 주위를 감싸고, 만수산에서 발원한 만수천이 절을 휘감아 돈다. 아늑한 숲속의 사찰 무량사는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이 일품인데, 좌우로 늘어선 전나무를 지나 만수천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개울 옆에 산딸나무가 있다. 언덕길을 올라가면 왼편으로 근육질의 줄기 모양을 한 서어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부여 무량사 극락전 앞에서는 목련과 주목을 만날 수 있으며, 왼쪽의 배롱나무, 우화궁 옆의 사찰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임천면 구교리에는 임천의 숲을 지켜 준 임천 가림수가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임천관아의 행정 중심지였다. 뒤로 성흥산을 두고 국가유산 사적인 부여 가림성을 쌓아 침입자를 방어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다만 남쪽으로 들판이 금강과 연결되어 모자람을 채워 주고자 비보를 세운 것이 바로 임천 가림수이다. 임천 가림수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기록에 따르면 동쪽 1~2리 혹은 남쪽 1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천 가림수를 형성할 초기에 임천군수가 왕버들을 주종으로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 문신 이민구(李敏求)가 임천군수로 재직할 때 임천 가림수에 대하여 지은 시가 이민구의 문집에 남아 있다. 1938년 지어진 『조선의 임수』를 보면 임천의 옛 읍에서 남쪽의 논산과 서천을 연결하는 도로상에 남북으로 400m에 걸쳐 숲이 조성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도 숲의 흔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왕버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도로를 따라 일곱 그루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