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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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Village Ritual of Eunsan, Honoring the Spirit of Baekje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해마다 음력 2월에 전쟁에서 사망한 원혼을 위로하고자 지내는 별신제.
[개설]
별신제[별신굿]는 2~3년 혹은 10년 주기로 개최하는 ‘대제(大祭)’나 ‘큰굿’을 일컫는다. 마을에서 따라서는 필요할 때 특별히 지내는 제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서해안 및 내륙 지역은 매우 희소한 편이다. 충청남도에서는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가 유일하다. 은산별신제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66년 2월 15일 중요무형문화재[현재의 국가무형유산] 제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국가무형유산으로 바뀌었다.
현재 은산별신제는 비단 은산리뿐 아니라 지역민이 함께하는 종합 문화 예술 축제이다. 본래는 윤달이 드는 해의 음력 2월에 길일을 택하여 행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로는 짝수 해에 대제(大祭), 홀수 해에 소제(小祭)를 지내는 식으로 구분하여 매년 양력 3월 말이나 4월 초에 개최하고 있다.
[별신제의 의미]
별신제의 의미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별신’을 신의 명칭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제사가 아니라 ‘특별신사(特別神祀)’, 즉 특별히 신을 제사하는 의식을 줄여 별신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전자의 견지에서 별신은 천연두를 가리킨다는 두신설(痘神說)을 비롯하여, 벌판의 신, 마을의 재앙을 막아 주는 골맥이신, 밝다는 뜻을 지닌 밝신, 소도(蘇塗)에서 섬기던 별읍(別邑)의 신, 여러 신을 불러모았다가 이별한다는 뜻의 별신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항간에는 ‘벌이신’으로 풀이하려는 견해도 있다. 지난날 은산은 장시가 성황을 이루는 시장촌이었던 만큼 시장 상인들이 돈을 벌어들이고 마을의 부를 일으키는 벌이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벌신과 벌이신의 발음이 유사하고, 은산별신제가 장시의 부흥을 꾀하려는 시장 상인이나 보부상의 참여가 두드러진 데에 해석의 근거를 둔 것이다.
별신을 한마디로 풀이하기는 쉽지 않지만, 위의 두 가지 해석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신격을 가리키는 동시에, 매년 정기적으로 올리는 제사와는 별개로 일정한 주기마다 베푸는 특별한 제사이다. 요컨대 은산별신제의 별신은 전장(戰場)에서 사망한 원혼과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지칭하고, 그러한 신령을 일정한 주기로 모시는 ‘특별한 제사’를 의미한다. 은산별신제를 지내는 제당인 은산별신당의 1947년 중수기(重修記)에 “해마다 정월이면 반드시 경건하게 제를 지내되, 3년에 한 번은 병마(兵馬)와 깃발을 세우고 전장에서 진을 치는 것과 같이 큰 제사를 지내니, 소위 ‘별신대제(別神大祭)’이다”라고 한 기록에 은산별신제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별신제의 토대가 된 장시와 역촌]
은산별신제를 언제부터 지내기 시작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대개의 별신제가 장시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승되었음을 상기할 때 조선 후기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은산별신제가 3년마다 거행되는 대제 또는 큰굿이었다는 점에서 경제적 기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행사의 비용으로 백미 100~200석[약 1만 8000~3만 6000ℓ]의 큰 경비가 소요되었으니, 주민들의 자치적인 걸립(乞粒)만으로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은산별신제는 규모나 준비 과정이 여느 지역의 마을 제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의 행사였고, 일정한 경제적 토대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애당초 별신제의 성립은 불가능하였다.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여 준 주체가 은산장을 주요 무대로 활동하였던 시장 상인과 보부상이다.
은산은 비록 조선 시대 읍치(邑治)는 아니었지만, 역원이 위치하였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입지 조건은 일찍이 인근의 물산이 집결되는 정기적인 장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조선 후기 모시의 생산과 유통이 대표적이다. 이른바 저산팔읍(苧産八邑)[충청남도에서 모시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한산·서천·비인·남포·홍산·정산·부여·임천 지역을 통틀어 일컫는 말]으로 유명한 모시는 은산장과 연계망을 갖는 홍산·임천·한산·서천·비인·남포 등을 중심으로 시장권을 형성하여 활발한 상품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저산팔읍 보부상 조직이 모시의 교역을 좌우할 만큼 막강한 장시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시장의 번창은 별신제의 중요한 물적 토대가 되어 주었다. 행사 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운집한 까닭에 시장의 교역은 활기를 띨 수밖에 없었고,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시장의 부흥을 위하여 기꺼이 별신제에 기부금을 내준 것이다. 보부상이나 상무사(商務社) 출신이 별신대제를 주관하는 기간 조직인 기성회(期成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나, 별신제의 축문에서 농사짓는 사람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의 부귀영화를 함께 빌어 준 것[市井都會 財穀咸富 農商錯居]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의 조사 보고에도 은산별신제와 장시의 관련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1935년 대제는 3월 16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되었으며, 3년마다 음력 2월 중에 택일하여 일주일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때 은산 사람은 물론이고, 가까이에 있는 예산·공주·정산 등지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와 은산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요컨대 은산별신제는 조선 시대 고을 단위에서 전승되었던 읍치(邑治) 제의의 전통을 지역 사회에서 수용한 것이다. 그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은 17~18세기 장시의 발달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장시가 호황을 누리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부여 지역은 대규모 별신대제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물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함께 산신제·장승제 등 기존의 소박한 마을 제사는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성대한 지역 축제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백제, 백제 정신의 부활과 은산별신제]
은산별신제는 광복 이전까지만 하여도 백제와의 관련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먼저 1936년 정월에 작성된 「별신 축문」에는 오방장군(五方將軍)을 비롯하여 중국 고대의 진(晋), 초(楚), 조(趙), 채(蔡), 위(衛), 제(齊), 연(燕), 진(秦), 한(漢), 오(吳), 당(唐), 명(明)나라 장수 등 90여 명이 기록되어 있다. 「별신 축문」은 이렇게 유명한 장군이 열거되어 있어 ‘장군 축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중국의 장수이고 조선 장수는 임경업(林慶業)·이순신(李舜臣)·유성룡(柳成龍)·김덕령(金德齡)·곽재우(郭再祐)·이완(李浣)·장붕익(張鵬翼) 등 7인이다. 문신으로서 유일하게 유성룡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들 장수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거나 명청 교체기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인물 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공신이다. 그런가 하면 1956년 「별신 축문」에는 중국의 장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맨 앞에 오방장군을 기입하고, 그 뒤에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신라 김유신(金庾信), 조선의 장수는 유성룡을 제외한 6인 외에 김응서(金應瑞)·강홍립(姜弘立)이 등장한다.
두 축문을 지금의 은산별신제 「별신 축문」과 비교하여 보면 동일한 신명은 오방장군뿐이다. 지금은 복신·토진 및 삼천장병신위가 주신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은산별신제는 애당초 전장에서 죽어간 장졸의 해원을 위한 위령제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지만, 백제 또는 백제부흥군에 대한 관념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백제 멸망의 주역인 김유신이 축문에 기록된 사실에서도 뒷받침된다.
은산별신제와 백제 호국 정신의 결합은 전승 주체의 변화된 인식을 반영한다. 백제에 대한 향수는 1950년대 지역 사회로 급속히 파급된 산물이다. 그 계기는 백제 정신의 고취를 기치로 내건 백제문화제의 성립이다. 백제문화제는 1955년 지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백제대제’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는데, 6·25 전쟁 직후의 피폐한 분위기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잊힌 백제 문화의 위상을 끌어올리고 지역민들에게 백제 후예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백제를 대표하는 충신인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의 위패를 모신 삼충사(三忠祠)[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가 건립되고, 삼천궁녀의 넋을 추모하는 궁녀제가 초기 백제문화제의 근간을 이루게 된 이유이다.
요컨대 백제, 백제 정신의 부활은 부여의 정체성 확립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지역 사회의 동향과 맞물려 은산별신제 역시 백제의 이념과 정신이 강조된 것이 분명하다. 실례로 1961년 「별신 축문」에는 기존의 조선과 중국 장수는 모두 사라지는 대신에 복신·토진 및 삼천병사신위가 등장한다. 바야흐로 은산별신제는 백제부흥운동에서 이름 없이 산화한 영혼들을 기리는 위령제로 새롭게 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1966년 2월 15일 국가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면서 은산별신제는 백제를 상징하는 명실상부한 지역 축제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장군제의 성격을 띤 은산별신제의 구성과 절차]
은산별신제를 전승하는 주요 구성원은 제관, 무관, 무녀, 악공 등이다. 제관은 화주(化主)·육화주(肉化主)·별좌(別座)·축관(祝官)·집례(執禮)가 있고, 무관은 대장(大將)·중군(中軍)·영장(領將)·선배비장(先陪裨將)·후배비장(後陪裨將)·사명집사(司命執事)·통인(通引)·좌수(座首)를 뽑는다. 이 밖에 지화(紙花)를 만드는 조화장(造花匠)을 비롯하여 풍물패, 삼현육각, 각종 기수(旗手), 제물 봉송자, 진대 운반자, 병졸 등이 있다.
한동안 은산별신제는 6일간의 행사로 정형화되었다. 첫째 날은 은산천의 물을 봉(封)하는 물봉하기를 시작으로, 화주집 조라술 담그기, 풍물패가 임원 집을 순방하는 집굿을 베푼다. 둘째 날은 인근의 산에서 진대를 베어 오고, 저녁에는 역시 임원 집을 돌며 집굿을 벌인다. 진대베기는 일종의 서낭대인 진대로 정하여 둔 참나무 네 그루를 베어 오는 의식이지만, 출전(出戰)을 가장한 군사 행렬과 회군 절차가 핵심이다. 이를 위하여 하당굿터에는 모군석(募軍席)이 설치된다. 군사를 일으키는 날이기 때문에 대장은 가장 먼저 도착하여 명(命)을 발동한다. 이어 사명집사·선배비장·중군·영장·후배비장·좌수·별좌 등이 차례대로 모인다. 모군석에 임원들이 좌정하고, 진대베기에 참여할 많은 사람이 대오(隊伍)를 갖추고 떠날 채비를 한다. 그리고 진대를 베러 가는 행군 도중에 넓은 공터가 나오면 ‘오방돌기’라 하여 요란한 풍물소리에 맞추어 진(陣)을 치는 모습을 재연한다. 오방돌기는 군사 행렬의 위용을 떨치는 과정이다. 이윽고 산에 도착하면 미리 보아 둔 참나무에 삼배(三拜)를 올린 다음에 진베를 베어 마을로 돌아온다.
셋째 날은 삼충사에서 꽃받기를 하고, 저녁에는 3일째 집굿이 거행된다. 특히 꽃받기는 진대베기와 같이 군사 행렬을 지어 나간다. 이때도 중간에 오방진을 펼치며 군사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넷째 날은 승마임원과 제집사가 깃발을 앞세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별신당에 제물을 봉송하는 상당(上堂) 행사를 갖는다. 이어서 산신·복신(福信)·토진(土進) 및 삼천장병신위(三千將兵神位)를 위하고 달래는 본제(本祭)를 지낸다. 이때 절을 할 때마다 고개를 세 번 끄덕거려서 더욱 공손한 예를 표한다. 이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 한다. 제사 말미에는 전 제관이 고두백배(叩頭百拜)를 올리는데, 이는 은산별신제에 보이는 배례(拜禮)의 특징이다.
다섯째 날은 오전에 무녀가 전날의 제사를 잘 받았는지를 가늠하는 상당굿을 베풀고, 오후에는 별신제에 초대받지 못한 여러 원혼을 위하며 풀어먹이는 하당굿이 열린다. 그리고 여섯째 날은 별신당 옆에서 독산제(獨山祭)를 지내고, 은산리 사방의 동네 어귀에 세워져 있는 장승을 돌며 장승제를 지내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와 같이 은산별신제는 전장에서 패망한 장졸들을 위무하는 위령제(慰靈祭)이자 장군제(將軍祭)의 성격을 지닌 지역 축제이다. 장군제로서의 두드러진 특색은 조선 시대 군사 제도와 유사한 제관의 선출, 전쟁을 가장한 진치기와 군사 행진, 그리고 군령권을 상징하는 깃발인 별신사명기(別神司命旗)·영기(令旗) 및 장군 축문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은산별신제가 여느 지역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장군제의 면모를 갖게 된 것은 은산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1947년 은산별신당 중수기에 별신제를 행하는 의미에 대하여, “은산 지역은 백제 때 전쟁터였으며, 전몰 장졸의 원혼과 분함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은 연유로 이따금 전염병이 나돌고 사람과 가축이 재앙을 입는다”라고 하였다. 즉 온갖 역병이 창궐하는 원인이 한을 풀지 못한 원혼에서 비롯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당을 다시 짓고 매년 정월에 반드시 극진하게 제를 모시되, 3년마다 병마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이 별신대제를 행사함으로써 땅속에 묻혀 막히고 억눌린 장졸들의 기운을 위로하는 것이다.
요컨대 은산별신제에서 늠름한 장수의 위용을 드러내고 전쟁 장면을 연출하는 까닭은 오랫동안 방치된 원혼을 위로하는 가장 극적인 의식이고, 아울러 그 신령을 즐겁게 하는 오신(娛神)이다. 이러한 은산별신제의 특징은 조선 전기 이래 장군제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경상북도 군위군의 ‘삼장군제(三將軍祭)’와 매우 흡사하다. 삼장군제는 단오가 되면 현의 우두머리 관리가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역마(驛馬)에 깃발과 북을 매달아 신을 맞이하며 거리를 누비는 행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