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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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박중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보물 제2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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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보물로 변경 지정 |
현 소재지 | 국립부여박물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
원소재지 | 부소산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성격 | 비 |
관련 인물 | 유인원 |
재질 | 대리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높이 237㎝, 폭 133㎝, 두께 31㎝[비신]|높이 113㎝[이수]|높이 335㎝[비]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부여박물관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당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념하는 백제 시대 비석.
[개설]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는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때 당군의 일원으로 전공을 세운 당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보물로 변경되었다.
[건립 경위]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는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운동까지 잠재운 뒤 비에 그 과정을 기록하여 세웠다.
[위치]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에 있다. 처음 세운 위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으며, 발견 당시에는 부여읍 부소산성 안에 쪼개져 누워 있는 상태였다.
[형태]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는 벽회색의 반점이 있는 대리석을 사용하였으며, 장방형의 비신(碑身)과 함께 비의 머리 장식인 이수(螭首)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수는 용 여섯 마리가 중앙에 있는 주옥(珠玉)을 서로 다투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당나라 초기의 화려하고 웅장한 수법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석비의 구조는 중국 비석의 형태를 도입한 것인데, 이후 신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석비를 비롯하여 후대의 석비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비신은 세로로 쪼개진 것을 접합하였다. 좌반부의 표면이 심하게 긁히고 깎여 나간 부분은 판독이 어렵다. 비신의 높이는 237㎝, 폭 133㎝, 두께 31㎝의 크기이며 이수의 높이는 113㎝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3.35m 이다. 글자의 크기는 2.4㎝이며, 제액(題額)의 글자 크기는 6㎝ 정도인데 전서(篆書)로 양각되었다.
[금석문]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의 비문은 총 34행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1행은 대체로 69글자씩으로 보이는데 21행까지는 글자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 비문은 해서체(楷書體)이다. 비면의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글자를 확인하기 어려워 초창기에 탁본된 자료가 귀중한 판독 자료가 된다. 기공비의 주인공인 유인원은 소정방과 함께 백제 정벌군에 참여하였으며 백제 멸망 후 백제의 옛 땅에 설치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도독을 맡았다. 비문의 내용에는 먼저 유인원 선조들의 계보가 있고 유인원의 자질과 유인원이 백제 정벌 이전 당에서 세운 공적들이 나온다. 비문에 ‘도호급지류진(都護及知留鎭)’이라는 표현이 나와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이 백제 고지에 설치한 통치 기구가 도독부가 아니라 도호부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가 처음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당평제비와 같이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 세워졌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에는 백제 멸망 이후에 전개된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660년설은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대동금석목(大東金石目)』에서는 당 고종 용삭(龍朔) 3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하였고,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서는 문무왕 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삭 3년과 문무왕 3년은 663년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조선사』에서는 664년에 건립되었다고 나온다. 유인원이 663년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663년 겨울 당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663년에는 기공비를 건립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러한 주장의 배경이 된다.
[현황]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의 야외 비각 안에 전시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는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유인원이 백제 옛 땅의 진수 책임자였고 또 백제부흥운동군과의 전투 등이 기록되어 있어 백제 멸망 상황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나당 연합군의 백제 정복 과정과 백제부흥운동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