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모산마을
-
모산마을에서 수박 재배를 시작한 지도 어언 40여 년이 지났다. 40여 년 쌓아 온 재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1960년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0년대 모산마을은 노지에서 수박을 재배했다. 노지재배는 한계점이 많아 일부 농가에서만 시도했으나, 그러한 경험은 수박의 기본적인 지식을 쌓게 하여 터널재배를 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배법은 겨울에...
-
북모산마을 경로당 에는 거실은 물론이고 방의 벽에 빼곡히 사진들이 걸려 있다. 방에 걸린 사진들은 지난 30년간의 북모산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북모산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문학봉 옹(78세)이 향우회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요것도 향우회 할 때 찍은 사진이고. 그때 나는 종친회 한다고 빠졌지. 향우회를 열고 마을회관 앞에서 단체사진...
-
도시의 골목길을 누비며 이른 아침부터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하던 소리가 사라진 지도 오래 되었다. 창원 지역에서는 푸르스름한 껍질의 강조개를 ‘재첩’이라 부르는데, 1976년 10월 경상북도 안동댐이 건설되고 대구 지방의 염색공단이 입주하기 전까지 낙동강에는 재첩이 그야말로 지천이었다. 특히 보리가 누르스름하게 익어가는 5월이면 강가 물 얕은 모래사장에는 재첩이 마치 냇가의...
-
창원시 대산면에 속한 모산마을은 낙동강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강 너머로는 밀양시 하남읍과 마주하고 있다. 마을을 감싸 흐르는 낙동강 위로는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수산대교가 세워져 있고, 밀양·김해 방면의 국도 25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수산대교에서 대산면을 바라보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강둑이 직선으로 뻗어 있고 그 둑 너머로 대산평야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
정확하지는 않으나 창원 지역에서 수박이 시배된 것은 조선 후기로, 장소는 낙동강 연안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창원수박이 대량 생산된 시점은 1960년대 초반으로, 창원시 대산면 갈전리에서 최초로 수박을 대량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해 70여 년 모산마을에서 살아온 문학암(78세) 옹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1960년대 갈전1동이 구 재배 방법을 통해 수박을 많이 생산...
-
농한기(農閑期)는 선조들이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산마을은 1970년대 후반 비닐하우스로 수박을 재배하면서 농한기가 없어졌다. 마을의 주요 작물인 수박 수확이 끝나면 후작으로 그 자리에 벼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경작하면 땅의 힘을 회복시키고 병충해를 예방해 주는 등의 수박농사에 보탬이 되기도 하여 대부분의 농가에서 윤작(수박과 쌀,...
-
1970년대 초반 마을의 한 농가에서 터널재배법을 도입하였다. 수박으로 터널재배를 먼저 시작한 사람은 고인이 된 이모씨라고 전한다. 이러한 터널재배로 소득이 올라가자 점차 많은 모산마을 농가에서 수박을 재배하게 된 것이다. 터널재배에 사용된 최초의 재료는 대나무와 한지였다. 그러나 대나무로 활대를 만들어 그 위에 한지를 덮어 만든 터널은 보온 효과가 크지 않아 짚으로 짠 섬피를 한...
-
1960년대 모산마을은 배추, 무 등의 농작물을 많이 재배하여 큰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땅이 없던 김말수 할머니는 밭작물의 소일거리를 통해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다. 그 당시의 삶을 김말수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넘(남)한테 쌀 한 되 빌려서 그날 저녁에 쌀 조금 넣고, 배추 넣고 해서 끓였다. 이만치 삶아서 옛날에 대접이 크다이가. 일하러 가는 할배(남편) 드린다고 뜨...
-
모산산악회는 1997년에 마을에서 70여 년을 살아온 문학암 옹이 주관하여 만들었다. 모산산악회를 인터뷰하기 위해 문학암 옹의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적갈색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인 그의 집은 넓은 정원이 만들어져 있어 아늑해 보인다. 서재로 들어가니 그가 살았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찬장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활동했을 당시 받았던 상장과 상...
-
모산마을은 예부터 인근에 산이 없어 땔감이 귀한 마을이었다. 그러니 보릿고개 시절에는 어떠했겠는가. 김말수 할머니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산에 올라가는 길이 험난하여 땔감을 하러 갓난아이만 등에 업고 나서면 집에 남은 큰딸이 울며불며 따라왔다고. 큰 딸을 혼자 집에 두려니 마음이 아파 결국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김말수 할머니는 마을에서 20...
-
아무리 ‘튼튼한’ 모종을 심는다 해도, 수박의 특성상 질병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농가에서는 ‘질병을 잘 이겨내도록’ 접목을 시도하였다. 접목은 다른 용어로 접붙이기라고도 부른다. 서로 다른 두 나무의 일부를 잘라 한 그루의 나무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접목을 하면 모종이 잘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양의 과실을 수확할 수 있어 대부분의 농가에서...
-
모산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헌과 구전을 통해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모산리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문헌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이다. 여기에는 김해도호부 대산면에 속한 모산리(牟山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모산마을은 조선 후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에서도 2백여 년 전에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최초로 입향하...
-
경상남도 창원시 대산면 모산리의 낙동강 가에 있던 나루터. 모산나루는 모산리 북모산마을에서 하남읍 수산리의 뱃길을 이어주던 낙동강에 있는 나루터이다. 수산리는 본래 수산현이 있었던 곳이고, 수산리 남동쪽의 대평마을에서 대산면 모산리로 가는 나루가 있었다. 모산리 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50여 년 전만 해도 나룻배를 이용해 수산장에 가서 농사에 필요한 물품...
-
수박의 당도를 결정하는 것은 ‘땅의 힘’이다. 낙동강 연안에 자리한 모산마을은 모래성분이 포함된 반사질토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세월 강물이 범람하면서 유익한 퇴적물이 쌓여 농토가 비옥하게 된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 유익한 퇴적물이 바로 수박의 당도를 높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북모산마을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형두(49세) 씨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
예나 지금이나 1,300리 낙동강은 쉼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굽이굽이 수만 수천 년을 그렇게 흐르는 동안 낙동강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주었으나 사람들은 낙동강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의 모든 자연환경이 오직 사람만을 위한 것인 양 편리 위주로 무분별하게 파헤치고 건설하여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을 지경인 오늘날이다. 낙동강 역시...
-
경상남도 창원시 대산면 모산리 모산마을에서 음력 10월 3일에 마을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동제는 부락제(部落祭)·산신제(山神祭)·당제(堂祭)·당산제(堂山祭) 등으로 불리는 마을 공동의 제사이다. 모산마을에서는 동제를 당산제라 부르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인근 사찰의 스님이 주관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동제를 모시는 신체는 마을의 수호신...
-
1960년대 노지재배를 할 당시 마을의 농가에서는 수박의 씨앗을 땅에 심어 재배하였다. 그런데 땅의 지력이 약한 상태에서 씨앗을 바로 심게 되면 질병에 걸려서 ‘조금 자라다 죽는’사례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반 농가에서는 씨앗을 땅에 바로 심지 않고, 온실에서 씨앗을 발아시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집에서 모종을 기르는 것을 ‘자가모종’이라 하는데, 집에서...
-
드넓은 동읍 대산면 일대의 들판은 예부터 낙동강이 적셔 주는 천혜의 곡창지대이다. 사방팔방 20~30리 안에는 산이 없는 질펀한 습지를 비옥한 농경지로 가꾸어 왔던 조상들의 땀과 숨결이 배어 있는 곳으로, 낙동강 물이 구석구석을 적셔 주었다. 그랬기에 전국 어느 지방보다도 농경문화가 발달했던 곳이어서 오늘날 선진 복지농촌이 된 게 아닌지 생각해 본다. 낙동강 물은 인체의...
-
한국농촌공사 창원지사의 옛 명칭은 창원농지개량조합이다. 더 오래 전 1970년대 이전에는 창원수리조합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산업개발조합으로 불렸다. 1960~1970년대에는 식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배를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기에 국가 중요 국정지표를 ‘증산, 수출, 건설’이라 했다. 그 시절을 일컬어 이른바 ‘보릿고개 시절’이라고도 했는데, 먹고살기가 힘든 시절인지라 당...
-
정차종 할아버지는 올해로 바지게를 만든 지 20여 년이 넘는다. 한 해에 20여 개가 넘는 바지게를 만들었다고 하니 지금까지 만든 바지게의 수만 해도 500여 개가 넘을 것이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겠거니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치 않게 아들이 운영하는 편의점을 방문하면서, 손님이 들고 온 바지게를 보고 바지게 만들기에 흠뻑 빠지게 되었단다. 정차종 할아버지의 삶은 그때부터...
-
수박모종을 심고 난 후 순(싹)이 자라나는데 한 달이 되는 시점에 순 따기를 한다. 잎과 줄기 사이에 여러 개의 순이 나오는데, 마을의 농가에서는 가장 먼저 나온 순을 원순, 원순 가지에 나온 순을 아들순, 아들순 가지에 나온 순을 손자순이라 부르고 있다. 원순 한 줄기(줄기의 열여덟에서 스무 마디 정도)와 아들순을 반대 방향으로 하여 두 줄기를 남겨 놓고 모두 따야 한다. 그러한...
-
동회는 한 해 일어난 일련의 마을 활동을 결산하고,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화합의 장이다. 북모산마을 동회는 매년 12월 중순에 개최된다. 1990년 중반까지는 매년 8월과 12월 2회를 개최하였지만 수박농사로 바빠진 1990년 후반부터는 12월에만 지내고 있다. 2008년 북모산마을 동회는 12월 29일 마을회관 겸 경로당에서 개최되었다. 오전 10시 북모산마을 이장의 목...
-
모산리는 북모산마을, 남모산마을, 송등마을 세 마을을 아울러 말한다. 그러나 1914년 행정개편에 의해 각 마을이 분동되면서 모임 또한 따로 조직하게 되었다. 이들 세 마을 대표로 북모산마을을 이끌어가는 마을 임원진과 모임을 소개할까 한다. 북모산마을 임원진으로는 반장(6인), 새마을지도자(1인), 개발위원회(6인), 재산관리위원회, 경로회장, 부녀회장, 청년...
-
1980년대 초반 모산마을 농가에서는 비닐하우스로 수박을 재배하면서 큰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이에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들도 수박으로 작목을 바꾸어 농사를 지었다. 그 당시 많은 농가에서 수박을 재배하였지만 재배 기술이 없는 농가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수박 품종을 고르는 것부터 장비를 구입하는 것까지, 자칫 잘못하면 수박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선 수박농사를 지었...
-
1970년대 초반 모산마을에서는 비닐하우스 재배를 도입하게 되었다. 비닐하우스 재배는 비닐로 온실을 만들고 태양열을 모아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모산마을에서 처음 비닐하우스로 농산물을 재배한 사람은 송모씨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본래 모산마을 사람이 아니다. 창녕군 길곡마을에서 농사를 짓다가 모산마을로...
-
낙동강과 더불어 살아온 부녀자의 삶은 어떠했을까? 북모산마을에서 56년째 살아오신 김말수(79세) 할머니의 삶을 소개할까 한다. 김말수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창원 대산면 수산리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머니의 집은 어릴 적 옥수수 가루로 죽을 끊여 먹으며 목숨을 연명할 만큼 가난하였다. 그러나 그리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
-
그대는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가? 고향을 두고 낯선 곳에서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숱한 사연을 안고 고향을 떠나 살아가고 있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이라 하지만 고향에 대한 애절한 마음만큼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게 또한 사람인가 보다. 정차종 할아버지 또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가 어릴 적 다녔던...
-
북모산마을 노인회장 문학봉(78세) 옹과 인터뷰를 하던 중, 문학봉 옹이 마을에 손재주가 많은 분이 있는데 그분의 생애를 담아 봄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얼마 후 문학봉 옹은 정차종 할아버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경로당으로 나오라고 했다. 정차종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차종 할아버지는 모산마을을 넘어 대산면에서도 ‘바지게 만드는...
-
씁쓰레한 내음이 풍기는 삼밭에 들어가면 햇볕이 쨍쨍한 여름 한낮에도 캄캄해서 하늘이 보이질 않았고 시원해서 좋았다. 또한 키가 2m나 넘는 삼의 줄기가 가지런히 서 있는 사이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기도 좋아 1960년대의 아이들은 여름날이면 강변 삼밭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강변을 따라 폭 1㎞, 길이 4㎞ 정도로 형성된 고수부지인 모래밭에는 여름철이면 군데군데 키가 큰...
-
수산대교에서 유등 방면으로 지방도 60호선을 타고 곧장 100m를 가면 마을을 관통하는 신작로가 나온다. 이 신작로를 따라가면 북모산마을과 남모산마을이 갈리는 삼거리가 나온다. 마을 사람들은 이 삼거리를 ‘공굴다리’라 부른다. 공굴다리라 불리는 삼거리에 다다르면 길 양쪽 변에 이승복 동상과 호랑이 동상이 서 있는 이색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대산면...
-
모산마을은 최고의 당도를 자랑하는 모산수박을 홍보하기 위해 1987년에서 1991년도까지 모산수박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는 남모산마을 출신인 박진덕 씨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산수박축제는 하나의 자연마을이 주관한 축제인데도 노래자랑대회, 수박품평회, 수박아가씨선발대회 등의 다채로운 행사로 지역민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한 뒷면에는 모산마을 사람들의 땀 흘린 노...
-
30여 년 전 산업화, 도시화로 농촌에 살던 청년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간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북모산마을, 남모산마을, 송등마을에는 각기 약 10명 정도의 청년들만이 남아 겨우 마을청년회가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각 마을의 청년회에서는 소수의 인원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송등마을 청년들을 제외하고 1993년 북모산마을과 남모산마을에서는 남아...
-
모산마을에는 당산할배와 당산할매라 부르는 2백 년도 더 된 나무가 있다. 모산마을 사람들은 이 두 나무에 매년 음력 10월 3일 마을의 무병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당산제를 지낸다. 이 두 나무가 할배와 할매인 걸로 봐서 부부 사이임이 틀림없는데(마을 사람들은 부부로 여기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남모산마을을 관통하는 (구)국도 25호선을 사이에 두고 할배나...
-
신작로에서 북부양수장 방면으로 지방도 60호선을 따라 100m 정도 가면 2층의 현대식 건물이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정차종 할아버지(81세)의 집이다. 집의 좌측에는 벽면을 붙여 만든 좁은 작업실이, 우측에는 낡은 창고 2동이 세워져 있다. 정차종 할아버지는 먼저 낡은 창고로 안내하였다. 천장을 보니 나무를 조립해 슬레이트를 얹힌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나무를...
-
낙동강 제방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모산마을은 장마철이 되면 강물이 범람하여 몇 차례 물난리를 겪었다. 마을 최대의 물난리는 1934년 7월로, 마을 사람들은 그때를 ‘갑술년 물난리’라 부른다. 엄청난 양의 장맛비가 쏟아져 강물이 마을을 덮쳤고, 마을 사람들은 만당[일명 만등]에 올라가 간신히 몸만 피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1963년과 1965년, 1969년 폭우가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