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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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弁韓 |
영어의미역 | Byeonhan Politics Group |
이칭/별칭 | 변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삼한시기 창원 지역에 있던 정치 집단.
[개설]
변한은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3세기에 걸쳐 경상남도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정치 집단이었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변한에는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현재 지명 비정이 가능한 곳이 다섯 나라 정도인데,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현 경상남도 밀양]·고자미동국(彌離彌凍國)[현 경상남도 고성]·구야국(狗耶國)[현 경상남도 김해]·안야국(安耶國)[현 경상남도 함안]·독로국(瀆盧國)[현 경상남도 거제 혹은 부산광역시 동래]이다.
[중심 세력]
변한은 현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김해·창원·고성·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 및 경상남도 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변한 중에서도 구야국과 안야국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규모가 큰 정치 집단이었다. 김해 지역에 위치했던 구야국은 변한 내에서도 중심 세력이었다. 이는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3세기까지 영남 지역의 유적·유물을 살펴보면 김해 지역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우세한 자료들이 출토되었는데, 무덤의 크기, 부장품의 다양함, 철기의 수량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야국이 변한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지리적 조건상 해상 교역에 유리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삼국지』에 의하면 중국 군현의 배가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바다를 건너 왜로 가기 전 일시적으로 정박하는 곳이 바로 구야국이었다. 즉 구야국은 당시에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던 해로의 중간 기점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변한은 북방 유이민의 이동 과정에서 형성된 정치 집단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 활발한 대외 교역의 결과 우수한 철기문화와 한군현계 문화가 경상남도 지역에 집중되면서 새로운 정치 집단으로서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4세기 이 후 변한 단계의 구야국, 안야국 등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남가라, 안라국으로 성장하였으므로, 변한 시기를 가야사의 범위에 포함시켜 전기 가야라 한다.
[분포]
1~3세기 변한 지역의 문화 현상으로는 목관묘·목곽묘의 보급, 와질토기의 성행, 철기문화의 보편화, 한군현계 유물의 유입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유물·유적이 조사되고 있는 지역은 부산 노포동, 창원 삼동동, 창원 다호리, 창원 성산, 함안 사내리, 고성 동외동, 합천 저포리 등이므로 이들 지역을 변한 시기의 변한 중심 지역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변한의 분포 지역은 창원·김해·부산 등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 및 경상남도 해안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규모]
변한의 규모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 ‘국’ 지배자의 칭호이다. 변한에는 12국이 있었고 이외에 여러 소별읍이 있었다. 그 정치 집단에는 거수(渠帥)가 있어서 큰 자는 신지이고, 세력의 크기에 따라 험측, 번예, 살해, 읍차가 있었다. 변한의 큰 나라가 4,000~5,000가이고 작은 나라는 600~700가였다. 따라서 거수가 신지의 칭호를 쓴 나라는 4,000~5,000가 정도였을 것이다. 변한 12국 가운데 대국은 구야국과 안야국이었다.
[성장과 교역]
변한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교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 외에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에 의하면, “나라에 철이 나서 한(韓)·예(濊)·왜인(倭人)이 모두 이를 얻어 가는데, 그들은 사고 팔 때 모두 철을 사용하여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듯하다. 또한 이를 두 군(郡)에 공급한다.”라 하였다. 즉 변한의 철은 마한·진한뿐만 아니라 예와 왜가 구입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역도 발전하였다.
A.D. 1세기 전반경에는 한반도 남부, 특히 변한과 낙랑과의 교역 관계가 상당히 밀접해 있었다. 교역품 중 군현으로부터 들여오는 것은 의책, 한경, 대도, 칠기, 낙랑제 유리옥 목걸이, 유리제 장신구, 동복 등 주로 북방계 유물과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여러 물건, 우수한 철기 및 토기 제작 기술 등의 선진 문물이었다. 이에 대해 변한 지역에서는 철과 포 등을 포함한 지역 특산물과 노비인 생구(生口) 등을 공급했다.
[생활문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통해서 변한과 진한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토지는 비옥하며,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며, 양잠을 잘 하였으며, 겸포(縑布)를 짰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탔으며,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예절에 맞게 하고, 남녀 간에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장례용으로 사용했는데, 그 뜻은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하고자 해서였다.”라 하였다. 그리고 풍속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즐겼다. 큰 고[瑟]가 있는데, 그 모습이 축(筑: 13줄로 된 옛 중국의 현악기)과 같았으며, 그것을 연주함에 또한 가락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였다…… 왜와 가까운 고을 남녀는 또한 문신을 하였다…… 그 풍속에 길가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어 길을 양보하였다…… 그 사람들의 형체가 모두 컸으며, 의복이 깨끗하였고, 긴 머리였다. 또한 폭이 넓고 고운 베를 짰다. 법과 풍속이 매우 엄격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변한과 진한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사 풍속만 다를 뿐 변한과 진한은 뒤섞여 살았으며, 언어·법속(法俗)·의식주 생활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