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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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 |
영어의미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이성주 |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
[개설]
청동기 시대는 인류 역사상 청동으로 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철제 도구를 사용하기까지의 시기로, 전 세계적으로 지역의 문화 내용에 따라 적용에 차이를 보인다. 한반도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 시대가 끝나고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민무늬 토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대 개념과 연대]
한반도에서의 청동기 시대는 좁게는 비파형 동검과 같은 청동제 무기나 도구가 유입되기 시작한 기원전 9~8세기 무렵부터 철기문화가 유입되는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자체적으로 청동기를 제작한 것은 세형동검 시기로 시작 시점이 비교적 늦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청동기 시대라는 용어는 청동기라는 금속기의 사용, 그 자체보다는 넓은 시기에 대해 적용하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 시대가 끝나고 민무늬 토기를 제작·사용하던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창원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 지방 역시 이러한 시대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적과 유물]
창원 지역은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적의 수가 급증한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것 같다. 이 시대부터 농경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회가 되었으며, 자연을 개발하여 경작지를 조성하고 곳곳에 정착 마을이 생겨나게 된다. 창원 지역의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마을과 고인돌, 환호, 그리고 경작지 및 제의유적 등이 발견된다. 단일한 성격의 유적이 단독으로 입지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복합되기도 한다. 이 지역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지리적으로 창원 분지 내부, 마산 진동, 그리고 동읍 일원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시기는 대체로 3,000년 전부터 2,300년 전 사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창원 분지]
지금과는 달리 창원 분지 안의 저지대는 습지로 되어 있어 농사짓기나 주거에 부적합 하였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청동기 시대 마을은 주변보다 조금 높은 구릉이 선호되었다. 지금의 창원 분지는 남천[남산천]·창원천·내동천이 분지 가운데를 흘러 마산만으로 유입되고, 하천 주변의 내동·외동·가음정동·서상동 등에는 작은 언덕이 솟아 있으며, 상남동 일대는 나지막한 대지상의 지형을 이루고 있어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산 패총이나 가음정동 패총은 원삼국·삼국 시대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맨 아래층에서는 민무늬 토기가 채집되어 청동기 시대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해발 100m 가까운 서상동 남산 유적도 상층에서는 원삼국시대 마을 유적이 노출되었지만, 그 아래에서 대규모 환호가 둘러싸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전형적인 환호취락(環濠聚落)이 발견되었다. 구릉 정상부에 입지한 마을의 외곽에 방어를 위한 대규모 환호를 둘렀으며, 내부에는 주거지와 망루 시설, 외곽에서는 폐기장과 조개더미가 확인되었다. 이 환호는 폭이 넓고 깊이가 깊을 뿐 아니라, 전체 길이도 200m 이상의 대규모로, 환호가 일종의 방어 시설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남산 유적의 취락은 대규모의 저장 시설, 수확용 반달 돌칼이나 목제(木製) 농기구를 만들기 위한 돌도끼의 존재 등으로 보아 농경을 위주로 하였을 것이다.
외동 지석묘군은 1929년 지금의 창원 남 중학교에 해당하는 웅남 소학교(熊南小學校) 교정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현장을 직접 확인한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일찍이 이것과 비슷한 예를 보지 못한 석실묘”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고인돌은 무덤 방이 2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1934년에는 학교 교정 다른 위치에서 간 돌검과 돌 화살촉 여러 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정황상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창원 남 중학교 교정에 1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상남동 지석묘군은 토월동 상남 시장 일대가 상남 지구 재개발 사업 지구로 선정됨에 따라 실시된 발굴 조사 결과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10여 기의 크고 작은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대부분 유실되어 지표에는 2개의 상석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지하에서 모두 7기의 청동기 시대 무덤을 확인하였고, 지금까지 ‘상남 지석묘’로 부르던 상석 아래에서는 매우 규모가 큰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은 4×2×2m 크기의 구덩이를 2단으로 파서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여러 겹의 뚜껑돌을 겹겹이 쌓아서 덮은 특이한 구조였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무덤의 크기나 매장 상태로 보아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은 상당한 세력이나 권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주변의 무덤에서는 돌 화살촉과 붉은 간 토기 등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진동만 해안 평야]
마산 합포구 진동면과 진북면 일대에는 진동만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해안 평야 지대가 발달해 있다. 그런데 이 평원과 주변 구릉 여러 지점에 청동기 시대 마을과 고인돌 군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곡저 평야 지대의 북편 진북면 망곡리에서는 청동기 시대 중기[6기의 주거지 중 장방형 주거지 1기는 전기에 속함]에 해당하는 마을의 일부가 발굴되었다. 마을을 둥글게 감싸는 얕은 깊이의 환호와 아울러,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일렬로 배치된 석관묘 군(石棺墓群)이 발굴되었다. 특히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주변의 흙으로 제작된 일본 구주 지역 양식의 야요이식 토기[彌生式土器]가 포함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 마을은 이웃한 덕곡리의 구릉 말단부에서도 발견되었으며, 그 남쪽 진동리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경작지와 수로가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 무덤은 진북면 신촌리와 망곡리, 그리고 덕곡리 일대의 마을과 인접한 장소에서 주로 석관묘 군의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전면 발굴된 유적이 거의 없어 전체 규모는 파악할 수 없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십 수 기의 석관묘가 일정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상태로 확인된다. 그 가운데 해안에 가까운 진동리 벌판에 자리 잡고 있는 고인돌군이 아주 특수한 사례이다. 이 진동 유적에서는 전형적인 기반식 고인돌은 단 1기가 발견되었지만, 45기나 되는 석관묘가 열 지어 배치되어 있으며, 유적의 남서쪽에는 묘역식 고인돌 11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 묘역식 고인돌은 장방형, 혹은 원형으로 둘레를 석축하고 그 안에 흙을 채우거나 돌로 덮은 제단 혹은 분구를 조성한 다음, 그 안에 매장 시설을 구축한 무덤 형식이다. 무덤의 축조 방법으로 보아 엄밀히 말하면 고인돌이라 할 수 없기에, 진동 1호 묘역식 고인돌은 분구묘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진동 유적은 매우 특별한 매장 의례의 반복을 통해 조성된 기념물이자, 진동만 해안 평야 일대와 그 주변 주민들의 의례 중심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덕동만의 좁은 해안 평야 지대에도 청동기 시대 중기의 취락과 분묘군이 확인된다. 마산 합포구의 현동 유적이 그것인데 이 산지 사면에 청동기 시대 중기 환호취락이 자리하고 있으며, 석관묘 및 석개 토광묘로 구성된 분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동읍의 대지]
창원시 동읍 일원은 낙동강 남쪽에 발달한 충적 평야 지대이다. 높고 낮은 구릉 지대로 둘러싸인 동읍 들판은 낮고 완만한 대지와 충적지, 그리고 저습지가 교대되는 지형적 특징을 보여준다. 동읍 일대의 고인돌 군과 마을은 주로 낮은 구릉과 저평한 대지상에 자리하고 있다. 동읍 용잠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중기에 속하는 송국리식 주거지의 마을이 발굴되었는데, 이웃한 낮은 구릉 지대에는 상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유명한 용잠리 고인돌 군이 분포하고 있다.
동읍 일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청동기시대 유적은 평야 지대로 뻗어 내린 매우 나지막한 능선 위에 자리 잡은 덕천리 고인돌 군이다. 이 유적은 장방형의 제단 모양으로 구축된 1호 묘역식 고인돌을 중심으로 하여, 훨씬 소규모로 구축된 2호와 3호 고인돌이 나란히 배열되고, 제단 주변에 석관묘가 추가되어 있는 형태이다. 1호 고인돌의 묘역은 반쯤 유실되어 있지만 전체를 복원하면 길이가 110m나 되며 폭은 60m에 가깝다. 그 묘역 중앙에 기반식 고인돌의 자리하고 있는데 50톤이 넘는 거대한 상석 아래에는 깊이 4m의 계단식 묘광이 굴착되어 있다.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반듯하게 둘레를 석축한 제단의 형태와 규모를 볼 때, 덕천리 유적은 동읍 일원의 청동기 시대 주민들에게 의례의 중심지로 조성된 것임은 분명하다. 특히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인물을 위해 구축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 단서를 준다. 또한 오랜 사용으로 마모되거나 부러진 비파형 동검을 재가공하여 만든 청동 화살촉이 주변 석관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는 망덕리 유적의 야요이식 토기처럼 멀리 떨어진 집단과의 관계망을 통해 전해진 것이라 생각된다.
[성격]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정착 농경에 집중하는 주민들이 확산된다. 충적 대지를 따라 정착했던 주민들이 인구가 늘자 구릉 지대와 곡저 평야도 점유하게 된다. 청동기 시대 중기가 되면 지역 사회가 통합되어 집단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물질문화와 문화적 경관 면에서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다. 지역 집단의 거점에는 환호로 둘러싼 대규모 취락이나 토목 공사를 장기적으로 진행하여 구축된 기념물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문화 경관은 당시의 정치적·의례적 중심지였을 것이다. 집단 사이의 연결망이 원거리로 확대되어 인적·물적 교류가 확장되면서 원근의 청동기와 토기가 유입된다. 이와 같이 발전된 사회 문화적 양상을 창원 분지, 진동만의 해안 평야, 그리고 동읍 일대 청동기 시대 유적 군에서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