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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64
한자 環濠
영어의미역 Ditch Enclosur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이성주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취락 등을 비롯한 일정 공간을 둘러싸도록 깊게 굴착된 인공 도랑.

[개설]

환호는 적이나 맹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기능을 가진 것도 있지만, 일정한 장소를 외부와 분리시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축조되기도 한다. 환호는 규모가 작은 것도 있으나, 2~3m 이상의 깊이로 넓은 범위를 에워싸는 대규모인 것도 있다. 환호는 정착 생활에 접어들면서 사회 집단의 규모가 증대되었을 때 등장한다. 그래서 신석기 시대 집단 간의 갈등, 경관에 대한 의미 부여, 그리고 의례 수행 등이 환호 출현의 배경으로 고려되고 있다. 환호 시설은 구대륙 곳곳의 선사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다. 유럽에서는 환호 시설을 코즈웨이드 엔클로져(causewayed enclosure)라 부르기도 하는데, 초기 농경 사회가 퍼져나가는 루트를 따라 환호의 축조도 확산된다. 신석기 시대 유럽에서는 환호가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 특별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스톤헨지와 같은 거석 기념물의 둘레에도 환호와 같은 시설물을 두고 있다.

동북아 일대의 농경 사회에서도 환호가 취락 시설물, 혹은 기념물로 매우 흔하게 축조되었다. 신석기 시대 중국의 경우 화북 지방과 동북 지방의 취락 유적에서 환호가 자주 발견된다. 기원전 4,500년 전후의 섬서성 강채 유적, 내몽고 흥륭와 유적에서는 마을 전체를 에워싸는 거대한 규모의 환호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기 말에 출현하여 원삼국 시대까지 축조되었다. 환호 축조가 가장 성행했던 지역은 야요이[彌生] 시대 일본 열도였다. 야요이 시대가 시작되면서 구주 북부 지역에 처음 등장한 환호는 농경 문화의 확산과 함께 퍼져 나갔다. 일본 구주 사가현[佐賀縣]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주거지와 창고·분묘군·공방 등이 밀집된 약 40㏊가 넘는 거점 취락을 에워싸는 환호가 구축되기도 하였다.

[형태]

환호의 평면 형태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에워싸는 취락의 형태나 지형에 좌우된다. 원형이나 타원형의 형태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형에 따라 잘록한 장고 형이나 다른 형태를 띠기도 한다. 창원 남산 유적은 지형이 푹 꺼져 있어 환호가 진행하기 어려운 곳을 성토하여 환호를 굴착한 경우이다.

환호는 보통 한 군데 이상 도랑을 일정한 폭으로 끊어 놓아 입구를 만들어 놓았으며, 이중 삼중으로 환호를 굴착한 경우가 많다. 창원 남산 유적이 다중 환호의 대표적인 예이다. 단면의 형태를 기준으로 환호를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형 환호는 U자형이 많고 깊은 환호 중에는 좁은 V자형, 넓은 V자형, V자형에 바닥만 다시 凹자형으로 판 것 등이 있다.

[변천과 특성]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기에 원초적인 환호의 형태가 나타나지만 소규모이고 화성 쌍송리 유적 등 발견사례도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환호가 가장 발달하는 단계는 청동기 시대 중기에 속하는 송국리 문화기이다. 이때의 환호는 진주 대평리 유적처럼 목책과 함께 마을 전체를 두르는 대규모 방어용 환호도 있지만, 울산 연암동 유적의 환호처럼 구릉 정상부에 아무런 시설도 없는 공간을 두르는 상징적·의례적 의미를 지닌 경우도 있다. 초기 철기 시대에도 합천 영창리나 부천 고강동, 그리고 안성 반제리에서와 같이 상징성을 가진 환호가 축조되는 가운데 마을을 두른 사천 방지리나 경산 임당동 유적의 환호도 존재한다. 풍납토성의 하층이나 양산 평산리 유적처럼 원삼국 시대까지 환호는 발달하지만, 토성과 산성이 축조되는 삼국 시대가 되면 소멸하게 된다.

청동기 시대 전기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초창기 환호는 창원에서 발견된 바 없다. 이른바 송국리 유형이라고 부르는 청동기 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환호가 창원 분지 내의 남산 유적마산 합포구현동 유적 및 망덕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그 중 창원 남산 유적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환호취락으로, 표고 100m 높이의 가파른 구릉 정상부를 2~4m 깊이로 굴착한 삼중 환호가 둘러싸는 형태이다. 환호의 상부 폭도 넓어서 지점에 따라서는 10m에 가까운 곳도 있다. 환호 내부에는 여러 차례 수리하거나 다시 굴착한 흔적이 남아 있고, 유적의 북동 편에 환호의 입구가 마련되어 있다. 내부에는 청동기 시대 중기의 원형 주거지와 방형·장방형 주거지가 혼재되어 있다. 유적 내부에서 엄청나게 많은 토기와 석기 류가 소비되었고, 고지에 입지한 대규모 환호는 방어시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일반 취락이라기보다는 방어 취락이나 거점 취락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중기의 환호취락으로는 마산 합포구 현동 유적이 있다. 구릉 하단의 사면부에서 일부분만 확인되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양상을 알기는 어렵다. 한 줄의 1차 환호가 구릉 위쪽의 마을을 에워싸는 형태로 굴착되었다가, 다음 시기에 방향을 달리하여 2중 환호를 다시 굴착하였다. 진북면 망곡리 유적에서도 부분적으로 반원형의 환호가 발굴되었는데, 얕은 깊이로 굴착한 환호지만 역시 마을을 감싸는 방향으로 구축되어 있다.

초기 철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에도 환호가 축조되는데 주로 구릉지에서 발견된다. 창원 남산 유적가음정동 유적과 같이 환호의 굴착 규모는 작지만 구릉 정상부를 전체적으로, 혹은 일부에 걸쳐 에워싸는 형태이다. 원삼국 시대가 지나면 환호는 서서히 소멸하는데, 산성과 같은 전문 방어 시설이 구축되면서 구릉지 환호가 하던 역할을 대체하게 된 것이 물론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국 시대가 되면 환호가 행궁이나 도성의 둘레를 두른 토성 혹은 석성의 해자와 같은 보조 시설로 바뀌어 간 것도 배경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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