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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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民抗爭 |
영어의미역 | Peasant Rovol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조선 후기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반봉건 농민 항쟁.
[개설]
조선 후기 사회는 봉건적 지배 체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봉건 사회의 모순이 확대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극심해졌다. 봉건 사회의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가 상품화됨에 따라 토지의 소유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밀집되었고, 따라서 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이에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농민들의 투쟁이 빈번히 일어났고, 농민들은 차츰 적극적으로 봉건 사회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9세기는 전국에 걸쳐 일어난 농민 항쟁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창원 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세종 실록 지리지』 창원 도호부 조에 “풍속이 거칠고 사나우며, 소송하기를 좋아한다.”라는 기록은 창원 지역이 봉건사회의 모순에 일찍부터 저항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862년 반봉건 농민 항쟁]
창원은 정3품의 부사가 파견된 대도호부가 설치된 읍이다. 19세기 무렵 창원에는 6,290호에 2만 9509명이 살고 있었고, 토지는 밭이 2,413결 32부 2속, 논은 4,131결 29부 9속으로 논이 많은 편이었다. 쌀 생산량이 많은 까닭에 창원은 고을 수령들의 수탈 또한 심각하였다.
창원에서는 모두 두 차례에 걸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두 번의 농민 봉기는 모두 환곡의 폐해 때문에 촉발된 것이지만, 11월에 일어난 농민 봉기는 삼정이정청 절목의 폐지에 따라 환곡이 폐지되고 대신 토지 1결당 몇 냥씩의 형태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발발하였다.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창원은 진주와 이웃해 있었으므로 진주 농민 항쟁의 소식을 바로 접하였다. 김석주·김태수 등이 장두가 되어서 각 면에 통문을 돌리고 여론을 모았다. 하지만 관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체포되었고, 이곳에 파견된 암행어사 이인명에 의해 혹독한 형벌을 받고 풀려나왔다. 이인명에 의해 이곳의 환곡 폐단과 수령들의 수탈이 드러나면서 창원 부사 서상악과 전부사 구성희는 경상도 문경현과 전라도 진안현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이 사건 이후 창원의 농민들은 즉각적인 대응을 유보한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정부가 5월 삼남 지방에서 삼정의 문란으로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 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정이정청의 설치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책도 보수층의 반발에 부딪쳐 겨우 3개월 남짓 시행하다가 10월 29일 전면 백지화되었다.
이에 창원 지역에서도 농민들의 항쟁이 본격화되었다. 11월 29일 부동면 금산에 사는 김대종이 중심이 되어 ‘환곡을 돈으로 환산한 액수가 너무 많으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는 통문을 돌리자, 이에 농민들이 호응하였다. 그들은 몽둥이로 무장하고 읍으로 들어갔다. 관에서 주동자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잡지 못하자, 나머지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하지만 별다른 혐의 사실이 없어 징벌을 가하고는 바로 석방했다.
12월 14일 부서면 감천에 사는 김동길, 중리에 사는 정의지 등이 잇달아 농민을 모았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대규모로 동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여러 마을을 다니며 농민들을 고무시켰고, 외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벌을 하거나 집을 불태우겠다고 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리가 몇 백 명으로 늘어났다. 창원 부사는 사람을 보내 그들을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구타만 당하였다. 이번에는 교졸을 보내어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중과부적인 교졸들은 몰매만 맞은 채 돌아갔다. 사흘 뒤인 12월 17일 농민들이 다시 모였는데 참여한 농민이 수천에 이르렀다. 수탈자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전에 면임(面任)을 지낸 자와 당시 좌수로 있던 자의 집에 불을 질렀다. 다음날에 읍의 네 개면 농민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읍의 남쪽에 있는 산에 불을 질렀다. 이 불을 신호로 농민들이 성안으로 몰려가 이서배의 집 두 곳을 불 지르고 다시 성 밖으로 나와 향임을 지낸 자의 집에 불을 질렀다. 밤이 되자 농민들이 남산으로 올라갔는데 앞서 피신한 김대종이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부사는 중앙에 보고했다. 이후의 사정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893년 반봉건 농민 항쟁]
1893년에도 창원 지역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1893년 10월 15일 창원에서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당시 고성 부사를 지냈던 오횡묵의 『고성 총쇄록』에 보이는, “읍내 대소민 수만 명이 소란을 피웠다.”라는 기록은 농민 항쟁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역사적 의의]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반봉건 농민 항쟁은 농민들이 스스로 반봉건 항쟁에 나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봉건 사회의 모순을 직접 겪고 있던 농민들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862년의 농민 항쟁, 1893년의 ‘수만 명의 소란’은 창원 지역의 농민들도 반봉건 농민 항쟁의 통하여 사회 변혁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