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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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Fighte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한 항일 운동가.
[민족 해방 운동]
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해방 운동 비밀 결사 조직인 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에서 안확·이형재·김기성·배중세(裵重世) 등이 활동하였다.
[독립 만세 운동]
1. 창원 읍내
3월 중순 들어 경상남도 각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전개되자 창원 읍내에서도 애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만세 운동이 비밀리에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갔다.
거사 당일인 3월 23일 장날, 비밀 조직의 확대와 연락을 통하여 다른 장날과는 달리 이른 아침부터 장꾼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오후 2시 30분경, 많은 장꾼들이 모이자 주도자들은 창원 보통학교에 있는 대수정(大樹亭) 앞에서 선언서를 낭독한 뒤, 거사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이어 만세를 선창하자 7,000여 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같이 만세 시위가 고조되자 이곳의 헌병과 일경 인력만으로는 무마할 수 없었다. 이에 일제는 마산 중포병 대대 일본군과 진해의 일본군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시위 군중을 총검으로 탄압하고 해산시키는 한편, 시위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김상익(金相益)·조희순(曺喜舜)·김호원(金浩元)·설관수(薛灌洙)·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조윤호(曺潤鎬)·신갑생(申甲生)·사치홍(史致洪)·송석민(宋錫敏)·신경환(申璟煥) 등이다.
2. 마산 지역
마산의 3·1 운동은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하지만 비밀 결사 조직인 대동 청년단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김용환·이형재 등 전투적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창신 학교와 의신 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 등도 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다.
3. 진해 지역
진해면에서는 대정 학교 졸업생 우을룡이 대정 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이복근과 신기옥 등에게 시위를 제의하였다. 이들은 제안을 받아들여 비밀리에 동급생들인 손흥조·이용식·김석수·김재복 등과 함께 준비하였다. 그러나 4월 2일 시위 준비가 탄로가 난 이복근·우을룡·신기옥 등이 체포되어 부산 검찰청 마산 지청으로 송치되었다.
웅천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은 김창업·정운조·김중환·문석주·김석환·김병화·김진찬·주국녕 등이 전 웅천 군수 김재령의 자택에서 밀의 및 준비를 하였다. 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의 여성들은 웅천 교회에서 시위 준비를 하였다.
웅동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사립 계광 학교 교사인 주기용·배재황·신자균·허전 등이 중심이 되었다. 또 유지 배건수·이원우, 청년 김일성·배종인과 서울 유학생 이부근·이종인 등이 귀향하여 가담하면서 준비하였다.
[사회주의 운동]
마산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김명규·김형두·손문기·이주만·이근우 등이 마산 신인회라는 사상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혜성사(彗星社)로 조직이 확대되어 사회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전파하였다. 아울러 성장하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 운동을 지도하였다.
김영규와 김형선은 1926년 조선 공산당의 경상남도 집행 위원회의 당과 공산 청년회의 책임자가 되어 공산당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조선 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6·10 만세 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김명규·김기호 등 10명이 검거되고, 김형선은 탈출하였다.
[무정부주의 운동]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 동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형윤·조한응·김계흥·김산·이석주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 활동]
학생들에게 계몽 활동을 벌이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설창수(薛昌洙)와 설철수를 들 수 있다. 설창수는 야학을 설치하여 빈곤 아동들을 대상으로, 설철수는 창원군 소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항일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외 농촌 계몽 운동을 통해 항일 운동을 전개시켜 나간 양명수(梁明守)는 창원군 상남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야학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노동·농민조합]
1933년 1월 경상남도 창원에서 혁명적 교육 노동자 협의회(革命的敎育勞動者協議會)를 조직한 김두영(金斗榮)·이재성(李在性) 등은 산업별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을 협의하고 일제의 통치 체제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안호(李安鎬)는 경남 창원군(昌原郡) 상남면(上南面)에서 상남 적색 농민 조합(上南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여 농민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진해 소작회 운동]
진해 지역에서 소작회를 만들고 소작인의 집단 행동을 진행하였는데 1924년 주병화(朱炳和)·문찬두(文酇斗)·김종건(金種健)·송상후(宋相候) 등이 발기인이 되어 활동하였다.
[신사 참배 거부 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이래 일관되게 신사 참배를 강요해 왔다. 1931년 만주 침공 이후 이를 더욱 강화하였고, 1937년 중일 전쟁 전후로 폭압적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창원에서도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고, 이에 1942년 7월경 창원군 창원면 동정리(東井里) 소재 창원신사(昌原神社) 뒤에서 창원 보통학교(昌原普通學校) 출신 10여 명이 청년 독립회(靑年獨立會)를 조직하여 신사 참배 거부 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광수(金光守)·김명수(金明守)·박대근(朴大根)·박상규(朴商圭, 朴相圭)·배장실(裵長實)·장재상(張在尙)·오경팔(吳慶八)·조문대(趙汶大) 등이 있다.
[대표적 인물]
1. 배중세
배중세는 1919년 창원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을 보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만주로 향했다. 만주로 가는 도중 밀양 출신 윤세주·윤치형과 만났고, 길림에서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황상규·한봉근 등과도 동지가 되었다. 그는 상해에서 폭탄 제조법을 배운 후 의열단에서 본격적으로 항일 투쟁 활동을 펼쳤다. 배중세는 의열단 내에서 국내 요인 및 각 기관을 폭파에 필요한 폭탄 반입을 담당하였다. 그라나 그 도중 체포되어 1944년 대구 형무소에서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였다.
2. 명도석
마산 지역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 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 협의하였다.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작정하고 당일의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행진·시위하게 하였다.
1920년 가을 미국에서 항일 활동을 펼치던 박용만(朴容萬)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만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6개월 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 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항일 교육에 힘썼다. 또한 1927년 7월 20일 신간회(新幹會) 마산 지회 창립 대회(馬山支會創立大會)에서 간사(幹事)로 선출되었다. 1929년 1월 28일에는 신간회 마산 지회 정기 총회에서 지회장(支會長)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 총회에서 집행 위원이 되어 신간회 해소 때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민족 말살을 강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 정신을 고수하였다. 1944년 8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 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3. 팽삼진(彭三珍)
마산 지역 출신으로 1919년부터 1935년까지 마산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1919년 3월 마산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이해 5월 15일 부산(釜山)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9월 5일에는 학생층을 대상으로 독립 정신을 고취하다가, 소요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도 또 다시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다가 1935년 7월 6일 마산 경찰서에 체포되는 등 계속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4. 문석주
진해 지역 출신으로 웅천 개통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웅천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유학생 회장을 역임하고, 졸업 후 재일 한국 노동자의 권익 옹호 활동을 하였다. 진해로 돌아와 조성복·김창업 등과 같이 민족·청년 운동을 하면서 청년 회관도 건립하였다. 여러 차례 옥고를 거치면서 마산 형무소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되었으나 타계하였다.
5. 배재황
진해 지역 출신으로 계통 학교와 계광 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경하여 경성 청년 학교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주시경의 한글 학교에서 국어학을 연구하고, 19세 때 계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등사기를 구입하여 죽벽 마을로 들어가 주기용·허전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며 웅동에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1934년 김해 진영으로 이주하여 영농하면서 일본인 지주와의 소작 쟁의, 농민 조합 설립 등 농민 운동을 벌였다. 광복 후 진영에서 한글 강습소를 열고 건국 준비 위원회 임원, 미소 공동 위원회 경상남도 단체 대표로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좌경 인사로 오해받아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6. 주기철(朱基徹)
진해 지역 출신으로 계통 학교와 오산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중퇴하고,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였다. 1929년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를 거부하자는 제안을 경상남도 노회에 제출하며 항일 투쟁을 시작하였다. 1931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부임, 평양 등지에서 목사로 활동하면서 항일 신앙 태도로 일관하여 수차례 구속을 거듭하다 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