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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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寧曺氏 |
영어의미역 | Changnyeong J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집필자 | 김정대 |
[정의]
조계룡을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세거성씨.
[연원]
조씨(曺氏)의 본관은 문헌에 10여 본이 전해지고 있지만, 모두 창녕조씨의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어서 오늘날에는 사실상 창녕 단본으로 통한다. 창녕조씨의 시조는 조계룡(曺繼龍)으로,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禮香)인데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이다.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서 기도하니 병이 완쾌되었고 문득 태기가 있었다.
그리고 꿈에 한 남자가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626년(진평왕 48)에 아들을 낳으니 용모가 출중하고 겨드랑이에 붉은색으로 조(曺)가 쓰여 있었다.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자 왕은 조(曺)를 성으로, 이름은 계룡, 자는 인경(鱗卿)이라 하사하였다. 나중에 부마로 삼고 창성부원군에 봉하였다. 벼슬은 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독총지휘제군사(輔國大將軍上柱國大都督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太子太師)에 이르렀다.
조계룡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신라 말에 아간시중을 지내고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덕공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된 조겸(曺謙)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창녕조씨는 고려시대 이래 삼남의 명족으로 고려시대에는 조겸의 손자 조연우로부터 조유기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평장사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113명, 상신 1명, 호당 1명, 공신 7명을 배출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이 유명하다.
[입향경위]
창녕조씨가 창원에 처음 자리를 잡게 된 경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창녕조씨에 대한 입향 설화가 전한다. 창녕조씨가 처음 창원으로 이거하여 왔을 때 현재의 창원시 성산과 남산 중 한 곳을 택해야 했다. 성산은 부자가 날 풍수이고 남산은 인물이 날 풍수였다. 창녕조씨는 재물보다는 인물을 중시하여 지금의 창원시 남산동에 안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린 창원 출신 창녕조씨로는 조치우(曺致虞)[1459~1529]·조효연(曺孝淵)[1486~1530]·조윤신(曺允愼)[1511~1571]·조계익(曺繼益)·조광익(曺光益)[1537~1578]·조호익(曺好益)[1545~1609]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북면 지개리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조치우는 성종 때에 문과에 올라 대구부사를 역임했는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조효연은 조치우의 아들로, 중종 때에 문과에 올라 벼슬은 한림에 이어 함안군수에 이르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비갈문(碑碣文)을 쓸 정도로 그의 학행은 높았다. 조윤신은 조효연의 아들로,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당세의 명현인 주세붕(周世鵬)[1495~1554]·임훈(林薰)[1500~1584] 등과 더불어 교유하여 의리를 강구하였다. 조계익·조광익·조호익은 모두 조윤신의 아들들인데, 맏아들 조계익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명종 때 문과에 오른 조광익은 퇴계의 문인으로 평안도도사를 역임했고, 역시 퇴계의 문인인 조호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소집하여 큰 공을 세운 뒤 안주목사·선산부사 등을 역임했다.
[현황]
창원시 성산구 남산동과 의창구 대산면 동포, 의창구 북면 중방 등에 창녕 조씨들이 집단으로 분포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도 읍지』[1832] ‘비판(碑版)’ 조에 퇴계가 지은 ‘조공효연묘갈명병서(曺公孝淵墓碣銘幷書)’가 있고, 『창원 군지』[1962] 87~88쪽에 이현섭(李鉉燮)이 지은 ‘증가선대부이조참의조계익묘갈명(贈嘉善大夫吏曹參議曺繼益墓碣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