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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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樂川詩社 |
영어의미역 | Yocheon Poem Club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상규 |
설립 시기/일시 | 1859년 3월 - 성주계곡에 있던 용화암 앞 시냇가에 요천시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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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3년 11월 - 요천시사 부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3월 - 사단법인 요천시사 설립 |
최초 설립지 | 요천시사 - 성주 계곡 용화암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조선 후기에 결성된 한시 단체.
[개설]
요천시사는 1859년 창원 남면(南面)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림들의 한시(漢詩) 단체이다. 성주사 계곡을 요천(樂川)이라 명하고, 이 모임을 요천시사(樂川詩社)라 한 뒤 매년 봄과 가을에 성주사 계곡 용화암 앞 시냇가에서 계제사(禊祭祀)를 지내고, 청풍 명월을 노래하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또한 학문을 도야(陶冶)하고 예(禮)와 도(道)를 숭상하여 풍속을 순화시키고자 하였다.
[변천]
1859년 3월 소산(小山) 김기호(金琦浩), 소은(小隱) 정재건(鄭在建), 요취(樂翠) 송병정(宋秉正), 가정(加亭) 김진헌(金振憲), 모산(帽山) 김연호(金延浩) 등 5인이 요천 유계를 입안하고, 1862년 9월까지 연 2회[춘3월과 추9월] 시회를 가졌다. 1865년 『요천시첩(樂川詩帖)』을 발간하였다. 1901년 농와(聾窩) 김용복(金溶馥) 외 4명이 2차 입안을 하고부터 1961년까지 11차에 걸쳐서 총 88명이 입안하였다.
그 후 장기간 활동이 정지되었다가 2003년 11월 유천(柳泉) 허규성(許圭成) 외 41명이 입안하여 되살렸다. 2006년 3월 사단법인으로 승격되어 허규성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활동 사항]
1859년 9월에 성주사 계곡에서 첫 시회를 열었는데 정재건이 노래했다. 1860년 3월에는 김기호가, 1861년 3월에는 송병정이 노래했다. 1862년 9월에는 너럭바위에 입안자 다섯 명의 이름을 새기고, 김연호가 노래했다. 시고(詩稿)가 백여 수가 넘자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이 김기호가 그 동안 모아두었던 시고를 파한(破閑)의 자료로 삼아 「요천시고서(樂川詩稿序)」를 찬술했는데, 이렇게 간행된 『요천시첩』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2004년 10월 창원의 집에서 제1회 전국 한시 백일장이 열렸는데, 대구의 원종숙이 「축 창원 발전」으로 장원상을 받았다. 2005년 10월 제2회 전국 한시 백일장에서는 대구의 김용락이 「정열공(貞烈公) 최윤덕장상(崔潤德將相)에 대한 추모 시」로 장원을 했다.
2006년 10월 개최된 제3회 전국 한시 백일장에서는 유수락이 장원상을 받았다. 2007년 10월 제4회 전국 한시 백일장에서는 이기석이 「창원 대도호부를 회고」하는 노래를 했다. 2007년 제3회 창원 한시 백일장에서는 부산의 이종영이 「요천시사를 창안한 소산 김기호 선생」을 추모하였다. 2008년 4월 제4회 창원 백일장에서는 이윤복이 「상사일 추원재를 방문한 소회」를 읊었다.
2009년 사단법인 요천시사(樂川詩社)가 주최한 ‘제9회 창원 전국 한시 백일장 대회’가 창원의 집에서 열렸다. 한시 백일장에는 전국에서 유림 및 한시 동호인 등 200여 명이 참석해 ‘賞 昌原春色[상 창원춘색, 창원의 봄을 감상하다]’라는 시제를 두고 기량을 펼쳤다.
[의의와 평가]
요천시사는 지역의 선유(先儒)들이 가난하지만 자연을 벗 삼으며 학문을 도야하고 예와 도를 숭상하여 풍속을 순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 동안 현대화 물결에 밀려 반세기 동안 그 맥이 끊어졌던 시회를 부활시켜 지역사회 정신문화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