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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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魚市場-午東洞-倉洞-名物-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오동동|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일균 |
[들어가는 말]
아귀찜·미더덕·어시장·오동동 ……. 잘 알려진 마산의 명물들이다. 마산의 명물 중에서 골목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제대로 모른다. 통합 창원시가 마산 도심 재생 사업을 하면서 골목을 부쩍 강조하고 있지만 스토리가 약하다. 스토리가 없는 게 아니다. 마산 어시장과 오동동·창동 골목에는 마산의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전해 주는 테마가 있다. 산업과 상업의 유형별 집중도가 뚜렷했고, 그 업종의 성쇠에 따라 명멸을 거듭했다. 위치나 동선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발걸음을 마산 어시장과 오동동·창동 순서로 옮기면서 골목 여행 한 번 해보자.
[어시장 복국 골목과 횟집·장어집 골목]
마산 어시장에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시간대나 동선을 놓고 봤을 때, 수협 어판장을 기준으로 복국 골목, ‘홍콩빠’, 대풍 등의 횟집 골목이 이웃해 있다. 장어 거리도 빠질 수 없다. 어시장 형성과는 별도로 일제 강점기인 1944년 마산 어판장이 처음 문을 열었다. 이는 어판장과 복국 골목, 횟집 골목 등의 형성 계기가 됐다. 어판장으로 상징되는 어시장 경제는 인근 오동동까지 영향을 미쳤다. 요정 골목과 통술 골목, 아구찜 골목[표준어는 아귀. 마산에서 부르는 대로 ‘아구’로 통칭]이 그렇게 생겼다.
새벽 6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수산업 협동조합 어판장에서 어시장 골목 여행을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새벽 5시 30분이면 선어·활어와 냉동어 경매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마산 어시장은 꼬리가 긴 주당들이 해장 겸 복국 골목을 휘청거리며 찾는 새벽까지 24시간 쉼 없이 돌아간다. 공판장 입구 왼쪽 1판장은 냉동어를, 오른쪽 2판장은 선어·활어를 취급한다. 어판장 일대에는 대형 냉동 창고와 중매인 사무실이 줄지어 있고, 수협 앞쪽에는 경매에 이어지는 소매 시장 골목이 자리를 잡았다. 경매 장면을 봐야 어시장의 제 맛을 안다.
“아 예~[시작], 어이! 네 개[4박스], 3번 2만 3000원 10번 2만 5000원 15번 3만 원~ 허이 15번![확정]”
박상돈 경매사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독특하다. 거기에 호흡을 맞추는 중매인들 손가락 신호도 현란하다. 검지 하나가 1, 검지·중지를 펴면 2를 나타낸다. 특이한 건 3인데, 중지부터 새끼 손가락까지 셋을 편다. 지난 2006년 『경남 도민 일보』에 「골목과 사람」을 연재할 때 만났던 그를 8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 사이 나이도 40대 중반이 됐고, 경력도 20년을 넘었다.
“선어 활어 위판은 일요일하고 명절 빼고 다 합니더. 많이 할 때는 하루 7~8천만 원씩도 했는데, 요즘은 1500만 원 안팎 이지예.”
또 한 명은 만나지 못했다. 1950년대부터 50년 이상 이곳에서 일했던 서양수[82세] 중매인은 은퇴한 상태였다. 8년 전 취재 당시 서양수는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은 한 해 거래액이 많아야 400억이지예.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 해 1,200억 원을 넘겼을 때도 많았지. 잘 하는 중매인은 한 해 40~50억 원까지 올렸다니까!”
막강했던 어판장의 경제력은 인근 복국 골목까지 활기가 넘치게 했다. 수협 어판장에서 해안 도로를 건너면 나타나는 복국 골목은 오동동과 동성동에 걸쳐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24시간 문을 여는 복집이 많다. 현 남성 식당 창업주였던 고 박복연이 1960년대에 지금의 미진 식당 자리에 복집을 열면서 골목이 형성됐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복어를 만져온 덕성 복집 하익자가 유래를 전했다. 8년 전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어판장 때문에 복국집이 생긴기지예. 중매인이나 도매인들이 새벽 경매를 끝내고 아침 묵는 데 아이가. 어떨 때는 중도매인들이 돈뭉치를 그냥 두고 가고 안 그랬나. 그런데 나중에 그걸 찾으러 오면 그기 그 자리에 있었다 안 카나. 호시절이었제.”
마산처럼 서른 집 규모의 복집이 한 동네에 집중된 곳은 전국에서도 드물다. 2000년 이후 복어 중독 사고가 현저하게 줄면서 복집 수도 그만큼 늘었다. 독이 거의 없는 양식 복어가 많아졌고, 요리사들의 조리법 자체가 독을 제거하는 데 더 철저해졌다. 간 같은 내장에다 눈·아가미까지 독이 들었을 법한 부위는 죄다 씻어내 핏대를 없앤다. 서른 곳이 넘는 이 골목 복집들이 주로 다루는 복어는 쫄복·까치복·금복·은복·황복 등 10여 종류이다. 요리 종류도 복국·매운탕·튀김·껍질무침·지리·수육 등 여러 가지이다. 7,000~8,000원 주면 먹는 가장 만만한 복국은 은복으로 만든다.
골목은 복집 골목 맞은편 마산 어시장 안쪽으로 이어진다. 아줌마 아저씨들 고함 소리에 회를 다듬는 칼질 난무하는 횟집 골목, 대풍 골목이 거기 있다. 여기서 대우 백화점 쪽으로는 어시장 횟집 촌 원조인 ‘홍콩빠’ 골목에 다시 해안 도로를 건너면 여름철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장어 거리가 펼쳐진다.
그렇게 마산 어시장의 명물은 골목에서 비롯된다. 골목 따라 걸으면서 만나는 어시장 명물들은 많다. 이른 새벽 어시장 수협 어판장의 경매 장면이나 손님들 부르는 고함 소리와 칼질 소리가 난무한 횟집 골목, 여름밤이면 100m 이상 이어지는 장어 거리의 휘황한 불빛들 ……. 주문 받은 생선을 공중으로 던지기로 유명한 미국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피시(Pike Place Fish)’처럼 브랜드화할 일만 남은 셈이다. 어시장 골목 여행은 그래서 명물 여행이다.
[오동동 타령의 고향 오동동 골목]
유명하기로 따지면 마산 오동동은 어시장 이상이다. 「오동동 타령」에 옛날 요정부터 지금의 통술집까지 술집 많기로 전국에 알려졌다. 타령 그대로 ‘오동동 오동동’ 흥얼거리면 그대로 리듬이 된다. 부르면 금방이라도 동동주가 흐르고, 장구 소리 동동거린다. 오동동 사람들은 「오동동 타령」이 당연히 이 동네 노래라고 한다. 노랫말이 일제 강점기 이후 오동동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이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궂은 비 오는 밤 낙수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그침이 없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야”
그렇게 오동동은 술과 여흥, 정취의 동네이다. 이 동네 정취 역시 골목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요정 골목에 있었고, 통술 골목에 있었다. 지금은 아구찜 골목이 대표적이다.
이번엔 오동동 골목 여행이다. 술부터 마실까. 밥부터 먹을까. “밥 먹고 어떻게 술을 마실까” 하는 주당에겐 예의가 아니지만, 그래도 밥부터 먹자. 그 유명한 아구찜 골목부터 간다. 아구찜 골목은 어시장 복집 골목에서 멀지 않다. 복집 골목에서 마산의 주 간선로인 중앙로를 건너 오동동 파출소 방향으로 20~30m 걸으면 만난다. 아구는 1960년대까지 생선 대우도 못 받았다고 한다. 생긴 것처럼 성질이 포악해 어선들 그물코를 씹기 일쑤이고, 육질도 인기가 없어 그물에 걸리면 버렸다. 기껏해야 대구탕을 흉내 내 아구탕을 해먹는 정도였다. 그런 아구를 1960년대 중반 찜으로 만든 사람이 현 ‘오동동 진짜 초가 아구찜 집’의 박영자[83세]이다. 8년 전 「골목과 사람」 취재 당시 그는 말했다.
“1965년 내 나이 서른 셋 때 아구탕 집을 열었어요. 고향인 부산에도 아구탕이 있었고, 이 근처 혹부리 할매집도 아구탕을 했지예. 그땐 새벽 술손님이 많았는데 1965년인가 1966년인가 하루는 단골이 들어와서 오늘은 배가 부르다고 찜을 한 번 만들어달라고 했지예. 대충 아구를 삶아서 콩나물에 고추장을 올렸더니 괜찮다 그러더라고. 그 뒤에도 몇 번 주문을 했고, 이 손님 저 손님 따라하길래 아예 메뉴로 정했지…….”
마산 아구찜은 겨울에 아구를 말려 봄에 내놓는 건아구찜으로 시작됐다. 이어 지금은 전국에 퍼진 생아구 찜이나 아구 수육으로 메뉴를 늘렸고, 아구 회에 아구 갈비까지 생겼다. 한때 부두 바닥에 구르던 신세였던 아구는 50년이 지난 지금 지느러미 하나까지 밥상에 오르게 됐다. 아구찜이 만들어진 배경처럼 끈질긴 생존 경쟁의 결과요, 마산 사람들 들개 같은 생명력이 빚은 작품이다. 전어 회나 미더덕·오만둥이를 대량 상품화한 것처럼. 마산 어시장 복국 골목 위 중앙로 위쪽부터 오동동 사거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아구찜 거리와 골목 일대에는 그렇게 스무 집도 넘는 아구찜 집이 몰려 있다.
배는 대충 채웠으니 이젠 술 한 잔 해야지. 아구찜 골목 바로 위쪽에 옛날 요정집들이 즐비했다는 요정 골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야시 골목’이라고도 불렸다. 현재 코아 양과 뒤에서 아구찜 골목으로 연결되는 골목이다. 「오동동 타령」의 노랫말처럼 그곳에 기생이 있었고, 장구 소리가 있었다. 어르신들은 “여기가 진짜배기 오동동”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일부 아구찜 집 등 식당을 제외하고는 술집이 별로 없다. 예전 요정 골목의 흥청거림이 없다.
그런 분위기가 살짝 옮겨간 곳이 한 블록 건너편 통술 골목이다. 서울·야망·수정·강림·수림 등의 통술집이 줄을 이었다. 통술은 ‘통영 다찌’나 ‘진주 실비’처럼 마산만의 독특한 주점 형태이다. 2006년 취재 때 만났던 50대의 통술집 여사장이 통술집의 내력을 전했다. 그는 1980년대부터 통술집을 운영했다. “요정은 비싸죠. 한 상 받으면 수십만 원 하니까. 그런데 통술집에서는 만 원짜리 한 장 내면 안주가 한 상 통째로 나왔어요. 그래서 통술집이라고 한 거죠. 비록 방이 없는 선술집이지만 안주가 한 상 통째로 나오는 요정 집을 흉내 낸 셈이죠.”
그는 젊었을 때 요정에서 일했다고 밝히는 당당한 사람이었다.
“내가 한때는 한 미모 안 했나. 1980년대까지 요정에 있었는데 그때가 진짜 오동동이었지. 참 사람도 많고 돈도 많이 풀렸지. 여자도 많고 주먹들도 많고. 여자들이라고 다 들어온 거 아임니더. 한 인물 안 하모 못 들어왔지.”
그리고는 맥주 몇 잔 마시더니 조금은 풀어진 눈으로 말한다.
“손님, 손님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기 뭐인데예? … 뭐 그리 고민합니꺼. 돈 많고 애인 많은 기 좋은 거 아임니꺼. 안 그래예?”
통술골목 조명처럼 빙그레 웃는 여사장 얼굴이 붉어져갔다.
[살아나는 마산의 원도심 창동 골목]
해마다 발표하는 ㎡당 공시 지가가 경남에서 가장 비싼 곳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이다. 창동 일대가 전부 그런 건 물론 아니다. 그만큼 창동이 한때 경남의 제일 번화가 역할을 했다는 흔적이다. 한때였긴 하지만 그곳이 번성했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나름의 구색을 갖추고 중년·장년은 물론, 청년까지 그곳에 몰렸다는 것이다. 일정한 역사도 따라야 한다.
오동동의 분위기가 여흥과 정취로 대변된다면 바로 위쪽 창동에는 그렇게 역사와 트렌드가 공존한다. 배치되는 두 분위기는 같은 동네 안에서 블록을 달리하고 있다. 우선 ‘250년 골목’으로 통칭될 만큼 역사가 오랜 골목부터 걷는다.
『마산 시사』에는 이전 마산시 남성동 제일 은행 마산 지점 자리에 조선 영조 때인 1760년에 ‘마산창’이 설치됐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조창은 대동미 수납과 운반을 맡은 기관으로, 이를 계기로 옛 마산포가 도시의 형태를 띠면서 발전했다. 바로 이곳이 마산 구도심의 중심인 ‘창동’이다. 그 맞은편에 옛 마산 포구와 마산창·창동을 연결하는 젖줄 역할을 한 250년 골목이 있다. 이 골목이 시작되는 곳은 가배 소극장 맞은편 주점 ‘해거름’ 입구 쪽과 오동동에서 불종거리 건너편 지금의 참여성 병원 쪽, 그 맞은편 불로 식당 쪽 등이다.
『경남 도민 일보』에 「골목과 사람」을 연재하던 2006년 당시에는 순안 병원[현 참여성 병원] 쪽에서 들어가면 ‘할매 충무 김밥’·‘창동 식당’이 나오고 골목 끝 맞은편이 불로 식당이었다. 해거름 쪽에서는 골목 이쪽저쪽에 ‘복희집’이니 ‘슈바빙’이니 ‘송학 통술’ 등을 거쳐 앞서 나왔던 창동 식당과 만났다. 골목 모양새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불종거리 쪽에 작은 꼬리가 달린 ‘士(사)’자 형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40년 옥녀 피부 관리집’을 하던 최기섭은 이렇게 소개했다.
“요정집이 몰렸던 오동동만큼은 몬해도 ‘망가집’이니 ‘할매 곰탕’이니 하는 선술집이 즐비했지. 근데 한 20년 됐나. 창동이 젊은 사람 위주로 바뀌고 이쪽 골목은 조금씩 죽었어.”
지금까지 8년 동안 그가 했던 말은 완전히 현실이 됐다. 골목 주변 가게들은 모두 뜯기고 지금은 주차장이 됐다. 한 쪽엔 주차장이, 또 한 쪽엔 새 건물이 들어선 이곳에서 옛 골목의 흔적은 없다. 격세지감이다.
그래도 해거름 쪽 골목은 젊은 사람들 위주로 스타일을 바꾸면서 지금도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해거름은 30년 전에 고 정의교 사장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장이 직접 LP판 틀어주는 칵테일 바(bar)로 두터운 단골 층을 갖고 있다. 2006년 4월 취재 당시 정의교 사장은 “여기서 장사 시작한 지 28년 됐는데, 지금은 내세우기가 싫어. 30년 되면 그때 하지 뭐” 하며 빙그레 웃었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 그는 ‘고모령’ 이야기도 했었다.
“1980년부터 장사를 했는데 2년인가 뒤에 이선관 시인이 요 맞은편 의상실 자리에 식당을 시작했어요. 이선관이 음식을 나르고 부인이 아이 들쳐 업고 음식을 만들었지. 반 밥집에 반 술집이었어.”
나중에는 부림 시장 앞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지역 예술가들에게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고모령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250년 골목 일대의 정취는 역사와 문화, 성년으로 집약된다. 마산이라는 도시의 성장과 발전, 이면의 정서와 문화가 압축돼 있다.
250년 골목에서 창동의 역사를 만끽했으니 이제 한 블록 건너 ‘쪽샘 골목’으로 가보자. 골목 안 ‘학문당 서점’ 뒤쪽 지금의 ‘백랑 갤러리’ 자리에 자그마한 우물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 추측한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마산 도시 재생 사업의 핵심인 ‘창동 예술촌’이 여기에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그 자체로 구성진 골목이다. 회화·조각·행위 예술·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올망졸망한 공간에 자신의 예술혼을 불어넣고 있다. 도예·유리·세라믹 등 공방만 해도 수십 개다. 뚝딱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작가들, 그리고 곳곳에 전시된 작품들까지 이것저것 힐끔거리는 재미만 해도 보통 이상이다.
예술촌의 할아버지뻘 되는 시대부터 있었던 점포들은 명물로 가득하다. 학문당 서점이나 쇠고기 집 ‘정근 식당’, 돼지고기 집 ‘삼도집’도 보통 평판이 아니다. 아래쪽 안집 김밥이나 돌우동 전문점 ‘만미정’의 명성도 그에 못지않다. 예술촌이 들어서면서 새로 생긴 가게들도 많다. 1980년대식 DJ 멘트가 지금도 나오는 막걸리 집 ‘청석골’도 있다. 다문화 주부들의 ‘레인보우 국시 장터’나 통술집 ‘금반옥’, ‘고모령’ 같은 막걸리 집도 많다. 예술성이 가미된 가게 간판이나 입구 디자인이 깔끔하다. 그것 또한 볼거리다.
이 골목에서 가지를 치는 샛골목도 유명한 곳이 많다. 점포 수나 명성이 예전만 못 하지만 족발 골목과 고갈비 골목이 아래쪽에서 뻗어나갔다. 족발에 소주, 고갈비에 막걸리는 1970~1980년대 이 지역 서민들의 단골 메뉴였다. 창동 통합 상가 상인회 간사 김경년은 그래서 이런 표현을 했다.
“창동 골목 여행을 준비하고 있어요. 위치도 분명하게 하고 테마도 옛날 그대로 살리는 거죠. 그게 도심 재생 사업 핵심이거든요. 창동을 살리는 길이고요.”
그게 어디 창동뿐일까. 오동동도 어시장도, 나아가 마산이나 창원시도 그간 묻혔던 골목 이야기를 되살리는 게 진짜 명물을 만드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