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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14
한자 忠節-香氣-上谷-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재우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에 있는 마을.

[마을의 역사]

상곡 마을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를 말한다. 삼한 시대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하나인 골포국 혹은 칠포국에 속했던 지역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굴자군[676년]에 속했다가 경덕왕 때인 757년에 의안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금주[현 김해시]에 속했다가 1274년(충렬왕 8)에 의창군에 소속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창원부[1408년], 1601년에는 창원 대도호부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1906년에 창원부 하서면이라 불렸다. 1913년에 창원군에 소속되고, 1980년 창원시 탄생으로 의창군에 속했다가 1991년에 창원군으로 개칭되어 내서면에는 10개리가 소속되었다. 1995년 도농 통합으로 마산시에 편입되었으며 내서읍으로 승격되었다. 2010년 7월 1일 마산시·창원시·진해시가 통합되어 지금의 행정 구역명은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이다.

『호구 총수(戶口總數)』[1789년]에 등장하며, 창원 도호부 서면에 속한 방리로 확인되며, 『한국 지명 총람』에 의하면 상곡리를 ‘읍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의 자연과 지리]

내서읍은 중부 경남의 중심 지역이며, 중서부의 관문으로 동쪽·서쪽·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물이 역류하는 특이한 지세이다. 동쪽은 천주산이 남과 북으로 부챗살같이 능선을 이루고, 두척산[무학산]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능선을 이루면서 마산과 경계를 이루는 마재가 있고, 서쪽은 내서읍의 주산인 광려산이 남에서 북으로 뻗어 내리면서 화개산과 포덕산 능선으로 이어져 함안군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 대산이 우뚝 솟아 마산 진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은 광려천이 흘러가는 칠원과 경계를 짓고 있어 삼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간 분지이다.

내서 지역은 주변 산이 가파른 형세이므로 옛날에는 가뭄과 홍수 때 범람으로 읍 중심 지역은 농사짓기가 어려웠으나 해방을 전후하여 제방 축조와 소류지 건설로 농업에 유리한 지역이 되었다. 특히 1960년대 말경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이 조성될 때에 광려천 변에 깔려있는 자갈과 흙이 이용되기도 하여, 그 때문에 하천 준설 및 제방 공사가 이루어져 많은 보가 형성되어 곡창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마산의 배후 도시로 발전하면서 많은 공동 주택이 광려천을 따라 건설되었으며, 중리 공업 단지도 광려천 변에 자리 잡고 있다.

내서 지역은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구마 고속 도로, 경전선 철도, 남해 고속 도로, 1004번 지방도, 국도 5호선이 지나고 있다. 최근에는 내서와 마산 현동 간을 연결하는 국도 5호선이 개통되었다.

상곡 마을내서읍에 소속된 10개리 중의 하나이다. 동쪽으로 광려천을 사이에 두고 신평 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화개산(華盖山) 일산봉을 등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삼계리, 북쪽으로는 상동 마을을 경계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무학산 전경을 바라보는 동쪽 한 곳을 제외하고는 화개산에서 뻗어 내린 산등성이가 남·서·북 세 방향으로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큰골·중산골에서 형성되는 물줄기의 영향을 받아 예부터 산간벽촌에서만 볼 수 있는 계단식 전답이 형성되어 있으며, 안담·바깥담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마을의 옛 자취]

마을 형성 경위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마을 이름이 처음에는 읍실 혹은 읍곡이었다고 한다. 지금 안담이 있는 부근에 약 200호의 대촌을 이루어 인근에서는 부자 마을로 알려져 한때는 마산으로 넘어오는 마재들까지 읍실 사람들이 경작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읍실 근처는 모기가 서식하지 않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마을 이름이 상곡으로 바뀐 것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본동 중산골 산 121 근처에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해봉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마을 양반들이 그 사찰의 승려를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이를 견디지 못한 승려가 읍실에서 상곡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면 마을 운세가 날로 번창할 것이라고 권유하여, 이에 상곡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절과 승려가 자취를 감추고 마을 운세가 날로 쇠약해져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고, 일부 마을 사람들이 이주하여 바깥담 동리를 형성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본동에는 예부터 함안·칠원 방면으로 왕래하는 유일한 보행로인 객산재와 큰재가 이 마을을 경유하였으므로 유생들의 출입이 잦아 언호재(焉乎齋)란 서당이 생겼는데 인근 함안·마산 등지에서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동네 전체가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마을을 형성하였고,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성주 이씨들은 바깥담을 이루면서 읍산재(揖山齋)·기소재(企小齋)·익산재(益山齋) 등 재실과 열부각·효열비·서대(西臺)·원풍대(願豊臺)·망배대(望拜臺) 등의 문화유산을 재건립하여 조상의 충효 정신을 숭배하고 있다.

살기 좋은 마을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와 가마터가 택지 조성 사업 과정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상곡리 29-2번지에서 기와 가마터가 발견되어 국립 진주 박물관 조사팀이 1991년 7월부터 8월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기와 가마터는 조선 초기의 지방요로 추정되며, 가마 형태와 축조 방법 그리고 세부 구조 등이 규명되었다.

[마을 민속]

동신제를 시행하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의 안위와 평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 제당을 설립하여 음력 12월 25일에 제를 지내고 있다. 당산 제당은 몇 번 옮겼는데 지금 설치되어 있는 것은 1983년 1월 6일에 세워졌다. 제당을 보호하는 회나무와 마을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정자나무는 상곡 마을의 유래와 흥망성쇠의 내력을 담고 있다. 여름철 마을 주민뿐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단결과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상부상조의 모임인 담계(談契) 및 등계(燈契) 등과 같은 계 조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나무와 관련된 옛이야기도 전해온다. 상곡리의 안담과 바깥담을 구분하는 경계 지점에 언제 심었는지는 알 수 없는 회나무 한 그루와 설립 연대가 확실치 않는 대를 쌓아 ‘댓걸’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상곡의 옛 이름인 읍실 마을을 말 타고 지나가려고 이곳 댓걸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말의 발자국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터가 세다고 하였으며, 그래서 일단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회나무가 있는 마을엔 마을 사람들의 과거 운을 터준다는 믿음이 있어 대개 상곡리 회나무도 그러한 내력을 안고 수백여 년의 세월을 마을과 동민의 흥망성쇠를 함께 나누며 자라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밑에 마을의 수호신당을 건립하여 동제를 모시고 있다. 옛날에는 매년 음력 1월5일에 제사를 모셨으나 시기와 제관 선정의 어려움으로 지금은 12월 25일로 변경하여 지내고 있다.

[충절의 향기 서린 서대(西臺)]

상곡 마을에는 우국충절을 보여주는 기념물이 있다. 서대가 그것인데, 상곡 마을에 살았던 이원순(李元淳)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통곡하던 곳에 그의 아들 이상화(李相華)가 아버지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937년에 세웠다. 서대 옆에는 서대를 세운 연유를 적은 ‘서대기(西臺記)’ 비석이 있다. 이원순은 자가 도여, 호는 소여라고 하며 1863년(철종 14)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래 고종의 승하 때까지 나라 잃은 한을 못 이겨 오랫동안 곡을 하며 슬퍼하였다. 특히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실성할 정도로 곡을 하였다고 한다.

‘서대’의 뜻은 송나라 충신이던 사고(謝翶)란 사람이 망국의 한을 생각하며 통곡한 곳에서 따온 것이다. 그곳은 서호와 항주로 유명한 절강성 동려현 부춘산에 있는 이름난 낚시터로 동대와 서대가 있으며, 이중 서대가 바로 사고가 올랐다는 곳이다. 사고가 지은 ‘등서대통곡기(登西臺慟哭記)’는 이후 망국을 상징하는 시로 잘 알려져 있다.

서대가 세워진 1937년은 일본의 식민 통치가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한반도에 대한 통치가 강고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서대를 세운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의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서대기를 쓴 사람은 김병린(金柄璘)[1861~1940]인데, 이원순의 아들인 이상화가 당시 창원군 동면 화양리 곡목에 살던 김병린에게 글을 부탁했다. 김병린은 당시 지역 사회에서 유학자로 서당을 열어 교육을 하고 또 항일우국의 마음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다. ‘서대기’에 따르면 김병린은 평소 이원순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 아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서대기를 새긴 사람은 김병화(金柄華)이다.

[상곡 마을의 문화유산]

1. 원풍대(願豊臺)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상곡리 산6 입구에 설립되었다가 1992년 택지 개발 조성 사업으로 상곡리 26-2번지 마을 입구로 이전되었다. 이 유적은 성주 이씨 이상우가 세운 것으로 세세년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비를 세우고 원풍대라 하였다. 원풍대에 새긴 글은 이상우가 썼다.

2. 망배대(望拜臺)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산114-1, 상곡 바깥담 소류지 둑 옆에 있다. 이 비는 성주 이씨 이시옥이 불편한 몸으로 선조고의 묘소를 향해 참배했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비를 세웠다. 이시옥은 1905년생으로 불의의 사고로 몸이 불편하여 보행에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망배대가 위치한 곳에서 약 600m 떨어진 상곡리 산128 선조고 묘소를 향해 참배하였던 것이다.

3. 신장대(新莊臺)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입구에 있다. 이 비는 마을의 어른 몇 분이 계를 모아 마을 사람들이 필요한 공용물을 구비하여 사용하게 하고, 또한 자금을 조성하여 효열 선생을 표창하며, 가로등 및 휴식처를 마련하여 마을에 기증하였으므로 마을 사람의 이름으로 그 공적을 새겨 비를 세운 것이다.

4. 상곡리 사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산121 근처에 있는 사지이다. 사찰이 있었던 시기는 알 수 없다. 상곡리라는 마을명이 생기게 된 것이 이 사찰 어느 승려의 권유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후 이곳을 중산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최근엔 이곳 근처에 자비정사가 건립되어 많은 불교 신자들이 왕래하고 있다.

5. 상곡리 열부각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26-2 마을 입구에 있다. 성주 이씨 이시록의 처 김해 김씨[김봉선] 부인의 정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열부각이다. 김씨 부인은 남편이 우연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정성을 다해 치료하는 한편 밤마다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어 남편의 병을 대신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에 부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여필종부라 하였으니 이 몸도 따라가요”하며 자진하였다. 이때 부인의 나이가 30세였으며, 때는 1918년 10월 22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김씨 부인의 정조를 기리기 위해 열부각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조병국이 기문을 짓고 김병린이 열녀전을 지었다.

6. 읍산재(揖山齋)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14-1에 있다. 성주 이씨 시조 이순유를 비롯한 선조들의 덕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7. 기소재(企小齋)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64에 있다. 성주 이씨 본동 입향조 이경방의 9세손 이원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8. 익산재(益山齋)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14에 있다. 성주 이씨 본동 입향조의 6세손 이영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지금의 상곡 마을]

현재 상곡 마을은 옛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1989년부터 시행된 택지 조성 사업으로 바깥담 주변에는 기존 취락을 제외한 들판에 주공 아파트를 비롯한 고층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도시로 변모했다. 주변에는 상가가 형성되고, 도로망과 교통량이 대폭 확충되어 주민들의 생활이 편리해졌으며, 농가 및 농업 인구는 줄어들고 산업 인구가 증가하였다.

본동 산130-4 화개산 줄기 일산봉 아래에는 불교 조계종 산하의 자비정사가 창건되어 불교 신자들이 찾고 있다.

본동은 성주 이씨(星州李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인동 장씨(仁同張氏), 청송 심씨(靑松沈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등이 살고 있고, 최근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급격한 인구 증가가 이루어졌다. 1994년엔 상곡 7리까지 분동이 되었다. 1994년 개관한 내서 종합 사회 복지관, 2003년에 설립된 내서 문화 체육 센터와 같은 문화 복지 시설도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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