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114 |
---|---|
한자 | 李殷相 |
이칭/별칭 | 노산,두우성,남천,강상 유인,노산 학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홍숙 |
[정의]
창원 출신 시인·사학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강상 유인(江上遊人), 노산 학인(鷺山學人). 필명은 남천(南川), 두우성(斗牛星)이다.
[활동사항]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1918년 아버지 이승규가 세운 마산 창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1923년 이후 창신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에서 공부하였다. 일본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는 잡지 『신생』의 편집 일을 도왔다. 귀국한 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이화 여자 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 후로는 『동아 일보』·『조선 일보』에서 근무했다. 1942년에는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기도 했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 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8·15 해방이 되어 풀려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945년에는 호남 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50년 이후 청구 대학[현 영남 대학교]과 서울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 사업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7년에는 시조 작가 협회장, 한글 학회 이사, 1969년에는 독립 운동사 편찬 위원장을 지내고 1972년에는 숙명 여자 대학교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70년에는 경희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74년에는 연세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6년 성곡 학술 문화재단 이사장을 거쳐 총력안보 국민 협의회 의장, 시조 작가 협회 종신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부터 노산 문학상 운영 위원회에서는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였다.
1978년에는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81년에는 국정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최근에 들어서는 그의 친독재 행적이 논란이 되어 2005년에 마산시와 마산시의회는 이은상 문학관을 마산 문학관으로 바꾸었다. 또한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노래비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은상의 친독재 행위가 마산 3·15 의거와 4·11 민주 항쟁을 폄훼하고 마산 시민을 모독한 행위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작품 및 저서]
1921년 ‘두우성’이라는 필명으로 『아성』에 시 「혈조」를 발표하였다. 이후, 1924년 『조선 문단』에 「영사행(瑩士行)」·「애사(哀史)」·「새벽이면」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26년 시조 부흥 운동에 맞추어 시조를 많이 썼다. 이후 「할미꽃」[예술, 1935. 4.]·「봄처녀」[예술, 1935. 4.] 등을 발표했다.
한편, 1932년에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 시조집』을 발간하였는데 여기에 「고향생각」·「가고파」·「성불사의 밤」, 양장 시조 「소경되어 지이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 평론에도 관심을 갖고 시조의 이론에 관한 「청상 민요 소고(靑孀民謠小考)」[동광, 1926. 11.]·「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 등과 초장이나 중장이 하나 더 있는 사장 시조(四章時調)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시조 창작 문제」[동아일보, 1932. 3. 30~4. 10.] 등을 발표했다.
시문집으로는 『조국 강산』[1954]·『노산 시문선』[1960] 등이 있고, 사화집으로 『조선 사화집』[1931] 등이 있다. 그리고 『탐라 기행 한라산』·『피어린 육백리』·『이충무공 일대기』 등 전기 100여 권을 남겼다.
[묘소]
이은상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 및 추모]
196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였고, 1969년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3년 5·16 민족상 등을 받았다. 1970년 10월 마산 산호 공원에 가고파 노래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