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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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秋振求 |
이칭/별칭 | 추근옥(秋根玉),옥당(玉堂),화중(和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355번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09년 1월 25일 - 추진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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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1월 19일 - 추진구 군용 열차 전복 의거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2월 18일 - 추진구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추진구 징역 5년 3개월로 감형 |
몰년 시기/일시 | 1974년 10월 6일 - 추진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추진구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추진구 출생지 -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355번지 |
거주|이주지 | 추진구 거주지 -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355번지 |
활동지 | 추진구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969-2 청도역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군용 열차 전복 의거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추진구는 1909년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高樹里)에서 출생하여 1974년 사망하였다. 1931년 11월 19일 군용 열차 전복 의거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추진구(秋振求)[1909∼1974]는 16세 무렵까지 집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남의 집 고용인으로 일하였으며, 22세가 되던 가을부터 청도 역전 앞에 있는 이영희 정미소에서 일했다.
1931년 만주 사변 발발 이후 추진구는 박근이(朴根伊)·전팔룡(全八龍) 등과 함께 철도 폭파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1년 11월 18일 밤 만주 지역으로 일본군과 무기를 수송하는 열차가 청도역에 도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이들은 김광조(金光祚)의 집 부근에서 길이 약 30.3㎝, 폭 21.21㎝, 높이 약 15.15㎝, 중량 약 15㎏의 돌 하나를 주워 선로 내의 침목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건널목 서편의 배인상(裵寅相)의 집 앞에서 열차가 지나가다가 전복하기를 기다렸다.
1931년 11월 19일 오전 0시 22분 청도역에 도착한 일본군 제8 사단 야포병 제8 연대 1개 대대와 병포·중기관총·필마 등 군용 물자를 실은 봉천행(奉天行) 임시 제3 군용 열차는 0시 24분 청도역을 출발, 27분 건널목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침목 위의 돌은 열차의 하부에 장치된 제동 장치에 걸려 약 50m 정도 끌려가는 데 그쳤으며, 열차를 전복시키거나 파괴시키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선로를 경비하던 철도 보선 공부(補繕工夫)가 발견하고 역장에게 보고하여, 일제 경찰의 조사로 전모가 밝혀졌다.
추진구는 1931년 12월 18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4년 칙령 제19호에 의하여 징역 5년 3개월로 감형되었다. 체포 당시 고문으로 발을 절게 되었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