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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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承差乞粟文 |
영어공식명칭 | Sungchageolsokmo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달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0년 - 「승차걸속문」 저자 서사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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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97년 - 「승차걸속문」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승차걸속문」 저자 서사원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43년 - 「승차걸속문」 저자 서사원의 『낙재선생문집』 간행 |
배경 지역 |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산격동 산79-1] |
배경 지역 | 이강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277 |
배경 지역 | 서사원 본가터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잡기류|잡저 |
작가 | 서사원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 의병장 서사원이 1597년 순찰사에게 군량 조달을 부탁 받고 지은 군량미 요청 글.
[개설]
「승차걸속문(承差乞粟文)」의 저자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壬辰倭亂期)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곽재겸(郭再謙)[1547~1615], 손처눌(孫處訥)[1553~1634]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과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의 이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승차걸속문」은 1597년 2월에 지어진 글이며, 청안현감으로 있을 때 군량미를 조달하라는 순찰사의 명을 받고 지방 제현들에게 군량미를 요청하는 내용의 걸문(乞文)이다.
[구성]
「승차걸속문」은 군량미를 요청하게 된 사정과 궁박한 처지를 설명하고, 군량미 출연(出捐)을 호소하는 내용과 전쟁에 임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승차걸속문」은 급박하게 흘러가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모두가 힘을 모아 이 위기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서두를 열고 있다. 이어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호서(湖西)의 상황을 말하는 순찰사의 말을 인용하여 군량미 조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쌀 창고를 손으로 가리켜 모두 헌납한 중국 오나라 노숙(魯肅)의 고사와 견훤(甄萱)[867~936]과의 전투에서 왕건(王建)[877~?]에게 전차를 바친 후삼국시대의 유차달(柳車達)의 고사 등을 인용하여 군량미 출연을 호소하고 있다. 출연하여 주는 군량미로 인하여 위급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기에 다시 한번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당부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특징]
「승차걸속문」은 다양하고 풍부한 고사를 활용하여 군량미 조달의 필요성을 드러내었고, 호소력 짙은 표현으로 군량미 출연을 이끌어 내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