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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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東㠍[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Choi Dong Jib |
이칭/별칭 | 진중(鎭仲),대암(臺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86년 9월 19일 - 최동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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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최동집 칠계[옻골]로 이거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최동집 유일로 장릉 참봉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0년 - 최동집 봉림 대군 사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최동집 명나라 멸망 후 낙향하여 농연 가에 집을 짓고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661년 6월 7일 - 최동집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64년 - 최동집 유허비 건립 |
거주|이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거주|이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
외가|처가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경력 | 대군 사부 |
조선 후기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최동집(崔東㠍)[1586~1661]은 현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 마을 경주 최씨(慶州崔氏) 입향조이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달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대구와 현풍, 성주, 영천 지역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 호는 대암(臺巖). 아버지는 현령(縣令) 최계(崔誡)이고, 어머니는 숙부인 순창 설씨(淳昌薛氏)이다. 부인은 이의윤(李宜潤)의 딸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증손녀이다. 아들은 생원 최위남(崔衛南)이다.
최동집은 1616년(광해군 8)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에 진사 3등 51위로 합격하였다. 1639년(인조 17)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이듬해인 1640년(인조 18) 봉림 대군(鳳林大君)[훗날 효종(孝宗)]의 사부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명나라가 망하자 팔공산(八公山) 부인동(扶仁洞)의 농연(聾淵) 옆에 집[농연 서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죽을 때까지 출사하지 않았다. 부인동 주민들과 결사(結社)를 맺고 동약을 시행하여 효제충신(孝弟忠信)을 가르치고, 향유들과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연경 서원(硏經書院)을 중건하는 데 앞장섰다.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연경 서원에서 악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에게도 배웠다.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 기옹(畸翁) 박공구(朴羾衢) 등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시문집으로 『대암 선생 문집(臺巖先生文集)』이 전한다.
1764년(영조 40)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최동집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는 유허비(遺虛碑)가 세워졌다. 비문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