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56 |
---|---|
한자 | 大邱 -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병희 |
[정의]
대구 지역 최초의 의료 선교사인 존슨을 통하여 전개된 의료선교 활동.
[내용]
대구 지역의 최초의 의사는 존슨(Dr. Woodbridge O. Johnson)[장인차] 의료 선교사이다. 존슨은 미국 북장로회의 해외 선교부 소속 의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1897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대구에 도착하였다. 존슨은 조랑말을 타고, 부인 에디스 파커는 장정 네 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짐꾼들과 함께 3일간의 힘겨운 여행 끝에 다다른 도착지였다. 존슨은 1898년 1년 동안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하여 한적한 파계사(把溪寺)에서 공부하였다. 한국어 공부에 시간을 보낸 후 1899년 성탄절 직전에 병원 개원에 필요한 의약품을 미국에 주문하였다. 개원 전에 집 앞에다 ‘미국약방’이라는 한글 간판을 내달고 약품을 판 것으로 짐작된다. 존슨의 미국약방이 오늘날 동산의료원의 모체가 되었다.
존슨은 1899년 10월 미국약방으로 쓰고 있는 초가집을 수리하여 병동으로 쓰기로 계획하고 개원을 서둘렀다. 진료소의 건물 구조는, 진찰실은 4.2㎡[1.26평]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약제실과 수술실이 자리 잡은 큰 방도 33.5㎡[10평] 정도였다. 비좁긴 하였지만 수술실, 약품 처방실 등을 갖추었다. 진료실, 수술실, 약품 처방실과 별도로 대기실이 있었는데, 15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차는 방이었다. 대기실은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추위와 더위, 비를 피하는 공간이었다. 병원 이름은 한문으로 ‘제중원(濟衆院)’이라고 쓴 족자를 내어 달았다. 제중원은 원래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불교적인 용어이다. 아마도 이 명칭은 알렌이 1885년에 서울에서 설립한 병원 명칭을 그대로 따온 듯하다. 비록 규모도 작고 의료기기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데다 의사도 단 한 명뿐이었지만 의료 환경이 열악하였던 당시에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보였다.
종래의 선교사가 미개교지(未開敎地)에 들어왔을 때에는 전도를 함과 동시에 반드시 의료, 교육, 구빈(救貧) 등의 사업을 경영하는 것이 선교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므로 선교사들은 사회사업을 통하여 굳게 닫혀 있는 전도의 문을 여는 방편으로 삼았다.
존슨 선교사의 제중원은 복음 전도의 유용한 도구 역할을 하였다. 존슨의 의료 조수로 제중원 최초의 전도인 서자명(徐子明)은 의료 조수 일 외에도 제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병원 대기실에서 전도 서적을 팔거나 성경 말씀을 설명하고 전도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서자명은 찾아온 환자의 주소, 성명을 잘 기록하여 두었다가 치료가 끝난 후 환자들의 소재지를 찾아가 예수 믿기를 권하였다.
특히 대구 지역은 유교사상이 어느 지역보다 강하여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곳이었다. 당시 대구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선 외국인 의사와 기독교에 대하여 신뢰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런 마음속에 낯선 기독교가 자리 잡기에는 선교사들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특히 제중원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가 돈 없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제중원은 거의 무료로 진료하여 줌으로써 제중원을 찾은 이들이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유교적인 이념과 질서 속에 사로잡힌 대구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의료선교를 선교 전략으로 구상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다. 의료선교를 통하여 서양의학에 대한 지역민의 불신을 없앴고, 또한 대구 지역에 많은 기독교 신자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업적과 태도, 그리고 선교사들이 조선 사회에 혜택을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대구 지역민의 반응도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양 의술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료사업을 앞세워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대구 교회가 급성장하는 기초를 놓게 되었다. 1899년 12월 개원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1,700여 명을 진료하였고, 50차례의 수술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1901년과 1902년 사이 치료한 환자 수는 2,000여 명이며, 1905년에는 진료 건수가 3,024건에 이를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의료사업은 대구 지역민들로부터 호감을 살 수 있었고,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존슨 의료 선교사는 1912년 11월 15일 신병으로 한국을 떠날 때까지 약 15년간 계속 일하였다. 존슨 의료 선교사는 1951년 7월 19일 목요일 아침 글렌데일(Glendale) 요양원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또한 1921년 2월, 플레처(Archibald Gray Fletcher) 원장과 제중원 직원 26명은 전도회를 조직하여 병원 내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환자들을 상대로 전도지를 나누어 주거나 전도, 설교 등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전도회의 초대 임원은 회장 플레처, 부회장 김재명, 서기 진기찬, 회계 김덕수로 조직되었다. 전 직원 26명이 모두 회원으로 가입한 전도회는 유급 전도인을 세우게 되었는데 남자들은 정식 임명을 받은 목사들이었고 여자들은 성경학교 졸업생들이었다. 모두들 경험이 많은 전도인들이었다. 그들은 남녀 한 팀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남녀 불문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차례로 돌아가며 순회 전도하였다. 전도회 소속으로 교회 설립에 직접 헌신한 전도인 중에 목사는 박덕일·김충한·정재순·김원휘·강신창, 장로는 허일, 남전도사는 손영균·황유하, 여전도사는 이주현·정일선·최경애·송복희·김남수·최순은·이민응·김순애·전기숙·손주안 등이다. 동산병원 전도회는 창립된 이래 1921년부터 1941년까지 147개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그중 전도인들이 설립한 교회는 모두 112개 교회이다. 이처럼 1921년부터 1941년까지 대구·경북 지역의 교회 설립은 대부분 동산의료원의 전도회에서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