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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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大邱 地域- 劇場- 劇場 文化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등장한 극장들과 극장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
[극장 시대가 열리다]
우리나라의 전통연희는 옥외에서 이루어지므로 극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극장의 역사는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1876년 부산이 개항되고 이어 원산[1879년], 인천[1883년] 등이 차례로 개항되면서 몰려든 일본인들에게는 가부키[歌舞伎], 노[能], 분라쿠[文樂], 교겐[狂言], 나니와부시[浪花節]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실내 극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설립된 극장으로 그 실체가 확인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892년 5월 당시 존재하였던 인천의 인부좌(仁富座)라고 한다. 하지만 인천보다 일찍 개항한 부산에 극장이 먼저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에서는 극장이 이보다 조금 늦게 등장하였다. 조선인 극장으로 1902년 희대(戲臺)를 시작으로 단성사와 연흥사[1907년], 장안사[1908년경], 우미관[1912년], 조선극장[1922년], 동양극장[1935년] 등이 속속 개관하였다. 일본인 극장으로는 1906년 무렵에 경성좌와 가부키좌, 수좌, 본정좌 등이 개관하였고, 낭화관[1909년], 경성고등연예관[1910년], 대정관[1912년], 유락관[1915년], 중앙관[1922년] 등이 개관하였다. 그리고 복합문화공간으로 1920년에 경성공회당, 1935년에 부민관이 개관하였다.
지방의 중소도시에도 극장이 등장하였는데, 부산에는 1903년경 행좌와 송정좌, 욱관[1912년], 보래관과 초량좌[1914년], 행관[1915년], 상생관[1916년] 등이 개관하였다. 인천에는 1897년 인천좌를 비롯하여 축항사[1911년]와 표관[1914년]이 개관하였다.
대구에도 1907년 금좌(錦座)를 비롯하여 대구구락부(大邱俱樂部)[1911년], 칠성관(七星舘)[1916년], 대구좌(大邱座)[1918년], 조선관(朝鮮舘)[1920년], 대송관(大松舘)[1922년경], 만경관(萬鏡舘)[1923년], 영락좌(永樂座)[1928년], 대구키네마구락부[1938년] 그리고 1931년에 대구공회당(大邱公會堂)이 개관하였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극장들]
1) 대구 최초의 극장 금좌와 대구 영화관의 효시 대구구락부
대구에 등장한 최초의 극장은 지금의 중구 태평로3가 216번지, 한때 대한통운이 있었고 근래에 평화상가가 있었던 곳에 개관한 금좌(錦座)[니시키자]이다. 1907년 3월에 일본인 나카무라 기이치[中村喜一]가 개관하여 4월부터 연극을 비롯하여 영화, 신파극, 다양한 행사 등을 하였다. 금좌가 개관함으로써 대구에도 ‘극장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금좌는 함석지붕의 바라크식 건물로, 1919년까지 12년 동안 대구에서 유일한 대중 오락장 구실을 하였다.
대구 최초의 영화관, 즉 활동사진 상설관은 1911년에 쓰지소노 지로[辻園次郞]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서편, 중구 대안동 79번지 대구중부교회 자리에 개관한 대구구락부이다. 대구구락부는 1912년에 이미 만담, 야담, 요술, 노래 등 대중 연예를 흥행하는 요세[寄席]로 전환하고, 이름도 나니와칸[浪花舘]으로 바뀌어 있었다.
1916년 10월에 오카모토[岡本]가 지금의 중구 향촌동 51번지 향촌주차장 자리에 활동사진 상설관인 칠성관을 개관하였다. 당시 변사로 주임변사 격인 시키시마[敷島]를 비롯하여 쓰카모토[塚本], 마스모토[增本] 등이 있었다.
칠성관은 여러 차례 관명을 바꾸며 1938년까지 존속하였다. 1924년 8월 당시 관명이 대영관(大榮舘)[다이에이칸]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1927년 5월 18일 만경관이 화재로 전소하자 이제필이 향촌동의 대영관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관명으로 영업하였다. 1929년 1월 1일 만경관이 신축 개관하자, 이제필은 관명을 만경관에 양도하고 ‘대경관(大鏡舘)’이라는 관명으로 영업하였다. 그 후 1930년 5월 초에 대구의 청년 실업가 조병관이 대경관을 인수하여 경영하였으며, 1933년 8월 12일 윤무용·김상덕·김파영이 ‘호락관(互樂舘)’으로 관명을 바꾸고 발성영사기를 장치하였다. 호락관은 1938년 7월 9일 화재가 발생하여 큰 손해를 입었다. 그 후 대구키네마구락부 개관 등으로 인하여 경영이 어려워져 휴관하였다가 폐관하였으며, 해방 후 한때 감리교회로 사용하였다.
1918년 6월 상순 대구기업주식회사에서 1만 5000여 원을 들여 12간 도로 동쪽 씨름하던 곳인 지금의 중구 화전동 4번지 관광버스 전용 주차장 자리에 대구좌를 개관하였다. 총평수 320평[1,057.85㎡]에 건평 237.8평[786.11㎡], 정원 1,500명 규모로 상당히 큰 연극 전용 극장으로 연극인들의 꿈의 무대였다. 1917년 8월 하순부터 서울 용산의 사쿠라자[櫻座]를 옮겨 와서 지은 것이다. 1920년 2월 당시 대구좌의 관주는 나카무라 기이치이었고, 1923년에는 나카무라 흥행부에서 경영하였다. 대구좌는 연극 전용 극장으로 설립되었으나 영화 상영, 음악 연주회, 무용 발표회, 각종 행사 등도 자주 열렸던 다목적 공간이었다.
대구극장은 연극을 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이므로 무대가 넓고, 직경 6간 반의 회전무대였다. 오도구카타[大道具方]가 있고, 하나미치[花道]와 하야시바[囃場]도 있었다. 하나미치는 배우들의 통로로 대극장의 경우 객석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도 있지만 대개 아래층 객석 좌편에 있었다. 하야시바란 무대의 한 옆에 있는 음악실을 가리키는데, 반주와 효과를 담당하는 곳으로 창살을 하였으며 대개 하나미치의 반대편에 있었다.
1925년 봄에 야마네 쇼타로[山根初太郞]가 인수하여 극장 안팎을 아름답게 개선하고, 9월에 재개관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지은 대구극장은 1963년 9월 18일 오후 1시 40분경 일어난 화재로 전소되어 사라졌다.
4) 최초의 조선인 전용 활동사진 상설관 조선관, 그리고 만경관
1920년 지금의 중구 종로1가 29번지, 롯데시네마[옛 만경관] 자리에 조선인 전용 활동사진 상설관인 조선관이 개관하였다. 다테지마료 산로우[立島領三郞]와 배계순이 1920년 2월에 조합을 조직하고, 4만 5000원의 거액을 들여 6개월여의 공사 끝에 8월 31일에 낙성식을 거행한 것이다. 조선관은 비록 일본인과 합작하여 설립된 극장이지만, 대구에 처음 건립된 조선인 전용 극장으로 민족자본이 투입된 극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관은 개관하고 겨우 4개월여 지난 1920년 12월 21일에 실화로 전소되었다.
1923년 3월 7일 조선관 터에 관객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만경관이 개관하였다. 조선인 14명과 일본인 1명이 합자하여 4만 5000원을 출자하여 건립하였는데, 목조건물로 객석에는 다다미를 깔았다. 한때 현영건과 이제필이 공동 경영하였으나, 1926년 5월부터 이제필이 단독으로 경영하였다. 만경관은 당시 대구 지역 조선인들에게는 문화적 자부심의 상징물이었다. 1926년 5월에 1층을 크게 확장하고, 객석을 의자식으로 개량하여 관객이 신발을 벗어 맡기고 들어가는 불편을 없앴다. 만경관은 본래 영화관으로 건립한 것이지만 연극 공연, 음악회, 각종 행사 등도 두루 열렸다.
만경관은 1927년 5월 18일 새벽에 실화로 전소하는 바람에 5만 원의 손해를 보았다. 만경관이 화마에 당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27년 5월 25일 조합 총회에서 재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대구의 조선인들에게 만경관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극장’으로서 위상이 각별하였던 것이다. 1928년 6월에 신축하기 시작하여 1928년 12월 말에 준공하고, 1929년 1월 1일 개관하여 서병환·이상무·민태정이 공동 경영하였다. 정원 1,000명의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태어났다. 1932년 2월 20일에 2만 4000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파나마운트 발성영사기 2대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이제필은 6월 11일부터 대영관[전 칠성관]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관명으로 계속 영업하였다.
그 후 신축하여 1944년 2월 무렵 대구영화극장으로 관명을 바꾸고 다시 개관하였다. 1945년 5월에 니시야마 기치고로[西山吉五郞]가 경영하였으며, 해방 직전 한때 하야시 고메이리[林米八]가 경영하였다. 해방 후 관명을 다시 만경관으로 바꾸었다.
5) 대송관과 그 후신인 대영관·소명관·신흥관·대구송죽영화극장
1921년 지금의 중구 화전동 11번지 송죽씨어터 자리에 활동영화 상설관 대송관[다이마쓰칸]이 개관하였다. 1922년 11월 당시 쇼치쿠[松竹]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영업주임은 오카모토 가메타로[岡本龜太郞], 주임변사는 후루자쿠라 레이바[古櫻麗葉], 연극부 주임은 후쿠이 도키오[福井時雄]였다.
1927년 6월 대영관(大榮舘)[다이에이칸]으로 관명을 바꾸었다. 1927년 5월 18일 만경관이 실화로 전소하자 이제필이 향촌동의 대영관을 빌려 6월 11일부터 ‘만경관’이라는 관명으로 영업을 하게 되고, 대송관을 대영관으로 바꾼 것이다. 1928년 9월 당시 경영자는 오에 우메[大江うめ]이었고, 정원은 234명이었다.
1929년 7월 25일 기무라 다케타로[木村竹太郞]가 오에 류타로[大江隆太郞]로부터 대영관을 인수하여 소명관(昭明舘)[쇼메이칸]이라는 관명으로 개관하였다. 1930년 6월 당시 경영자는 스즈키 류키치[鈴木留吉]이었으며 쇼치쿠, 서양 영화, 마키노프로덕션 작품을 상영하였다.
1931년 4월 17일경 야마오카 다카토시[山岡高利]가 경영자가 되어 관명을 신흥관(新興舘)[신코칸]으로 바꾸었다. 그 후 1934년 2월 당시 경영자는 미쓰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이었고, 토키는 스플렌더톤이었다.
1940년 7월 6일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畫劇場)[대구쇼치쿠영화극장]이 개관하였다. 시마다 카네시로[島田金四郞]가 오랫동안 폐업 상태로 있던 신흥관을 인수하여 관명을 ‘송죽영화극장’으로 변경하고, 대대적으로 보수한 후 7월 5일 시사회를 열고 6일에 개관한 것이다. 1942년 9월 당시 경영자는 이토 야스고[伊藤勘吾]이고, 수용 인원은 570명, 발성기와 영사기는 모두 로얄이었다.
해방 후 관명이 조선영화극장, 대구송죽영화극장, 송죽극장 등으로 바뀌었으며, 2002년 2월 말부터 오랫동안 휴관했다. 2009년 말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300석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인 송죽씨어터로 재개관하여 주로 연극 공연을 하고 있다.
6) 영락좌와 그 후신인 영락관·대구동보영화극장
1928년 8월 4일 이마모토 시미즈[今本善造]가 지금의 중구 화전동 14번지[옛 자유극장 자리]에 공사비 1만 2000원을 들여 총 건평 74평[244.62㎡], 정원 600명의 2층 요세인 영락좌[에이라쿠자]를 개관하였다.
1930년 무렵에는 닛카스[日活] 영화를 상영하는 활동영화 상설관 영락관(永樂舘)[에이라쿠칸]으로 바뀌었다. 경영자는 나가오 기주로[長尾喜重郞]였다. 1933년에 증개축하였으며, 정원은 800명이었고, 닛카스·신코[新興]키네마·서양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토키는 오더폰이었다. 1934년 12월 당시 경영자는 호리코시 유지로[堀越友二郞]였으며, 1937년 1월 26일 최신 발성영사기인 인터내셔널 영사기를 갖추었다.
영락관은 1943년 4월에 개축 중이었으며, 8월 이전에 대구동보영화극장(大邱東寶映畵劇場)[대구도호영화극장]으로 관명을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후에 다시 영락관이라고 하였다가 1946년 8월 1일부터 자유극장으로 바꾸었다.
7) 군계일학, 대구키네마구락부·대구보총극장
1938년 8월 21일 중구 동성로2가 88번지, 지금의 CGV대구한일 자리에 대구키네마구락부가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조선영화흥업주식회사에서 1938년 8월 21일 오전 10시에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고 개관한 것이다. 대구키네마구락부는 옥단건축사무소(玉團建築事務所)가 설계하고 야시로쿠미[屋代組]가 시공한 대구 최초의 철골·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대부분 일본에서 가져온 최신의 자재로 지었다. 건평 243평[803.30㎡], 연건평 620평[2,049.58㎡],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정원은 830여 명이었다. 최신의 구조와 공법을 사용하여 지은 건물로 외관과 함께 내부 공간이 웅장하여 건물로 위용을 과시하며 대구 극장가를 단번에 평정하였다. 1940년 1월 당시 관주는 대구영화상회였고, 지배인은 호리코시 유지로[堀越友二郞]였으며, 1940년 12월 당시 경영자는 호리코시이었고 발성기와 영사기는 롤라였다. 1943년 4월에는 관명이 대구보총극장(大邱寶塚劇場)[대구다카라즈카극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방 후에는 다시 키네마구락부로 바뀌었고, 그 후 키네마[1946년 1월 말], 문화극장[1950년 5월 23일 개관], 국립극장[1953년 2월 14일 개관], 키네마[1961년 12월 31일 개관], 한일극장[1967년 9월 17일 개관] 등으로 여러 차례 변신하였지만 1995년 11월 문을 닫았으며, 1996년 4월에 철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8) 문화예술의 전당, 대구공회당
1931년 11월 지금의 대구콘서트하우스 자리에 복합문화공간인 대구공회당이 문을 열었다. 대구부에서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즉위식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1929년 1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총 공사비 약 15만 원을 들여 1931년 11월 11일 낙성식을 열고 개관한 것이다. 외관을 붉은벽돌로 장식한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평면 및 외관 구성에서 실용성을 추구하였다. 개관 당시는 건축부지 480평[1,586.77㎡], 정원 용지 357평[1,180.16㎡]에 연건평 1,075[3,553.71㎡]평, 높이 63척[1908.9㎝]의 4층[지하 1층 포함] 건물로 3층 대집회실은 약 2,000명, 2층 소집회실은 약 180명, 식당은 약 1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한때 일부를 호텔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대구 최초의 호텔이라고 한다.
대구공회당은 영화 상영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열려 문화예술의 전당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6·25전쟁 때 군인극장으로 사용하였으며, 한때 대구방송국으로 사용하였다. 1972년 9월 시민회관을 짓기 위하여 철거하여 일제 강점기 때 지은 대구공회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극장 문화]
1) 1930년대 대구 극장가의 모습
1930년대 대구 극장가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1933년 8월 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제필의 경험담을 통하여 그 모습을 살펴보자.
‘1921년부터 4, 5년 동안은 저급한 서부활극으로 일관했다. 1926년부터 3년간은 활극물에서 돌변하여 고급 문예극을 크게 환영하여, 입장료는 보통 40전, 50전이고, 좋은 프로는 70전, 80전 해도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어 상설관 개관 이래 최고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다가 1929년부터 다시 서부활극 류를 요구하고, 입장료도 최고 20전이 안 넘도록 헐한 것을 택하였다. 경제공황의 여파로, 요금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다니던 중산층 팬들의 발걸음이 뜸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근래 두 해는 일본 영화에 쏠리는 경향이 현저하여 일본 여배우의 이름을 외우지 않고는 영화 팬 행세를 못 하는 지경이 되었으며, 더구나 일본 영화는 반드시 일본 상설관에서 보아야 멋이 있고 조선인 극장에서 조선말로 해설하는 것을 빈정거렸다.’
대구의 청소년들은 어떠하였을까? 1932년 2월 22일 자 『조선일보』가 2월 19일 밤의 모습을 알려준다.
“시내 중등학교 학생 5, 6명이 극장에 몰려들어 공중도덕을 무시하고 말도 없이 관객을 타 넘어 다니며 구경 온 기생들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른다. 심한 놈들은 어리고 어여쁜 기생의 주소와 성명을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에 서신을 보내거나 방문을 한다. 그들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모두 혀를 내두른다. 이미 대구는 ‘처음 만난 곳은 야시장이요, 그다음 정 들기는 활동사진관’을 불러대는 지경이었다.”
1930년에 대구의 극장 입장료는 10전에서 30전 정도였다. 물론 대작의 경우는 훨씬 비쌌다. 당시 쌀 한 가마[80㎏]는 13원, 콜럼비아레코드 1장은 1원 50전, 월간지 『삼천리』 1부는 20전, 대구의 이발비는 30전이었다. 극장 안은 2층으로, 계상[2층]이 계하[1층]보다 비싸다. 1933년 「밀림의 왕자」 때 단성사에서 계상은 대인 70전[소인 50전], 계하는 대인 50전[소인 30전]을 받았으며, 대구 호락관에서는 계상 50전, 계하 35전을 받았다.
2) 변사,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변사(辯士)는 무성영화 시대에 스크린 옆의 의자에 앉아서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주던 사람으로,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라 때로는 영화 속의 인물이 되어 연기도 한 엔터테이너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변사는 원각사에서 변사를 시작한 우정식이라고 한다.
변사는 어느새 영화관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영화의 흥행이 변사들의 입심에 좌우되다 보니 극장 간에 변사 스카우트전이 벌어졌는데, 대구에서도 1929년 8월 하순 대경관과 만경관이 변사 김영환을 두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일류 배우의 월급이 40~50원이고 고급 관리의 월급이 30~40원 정도일 때, 보통 변사들이 70~8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하니 신이 내린 직업이다. 그들은 밤마다 기생들의 품속에서 몸과 세월을 허비하였다. 대구 극장가에는 비극의 방선봉, 사극의 김파영, 희극의 손병두가 변사 트리오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인텔리 변사 김파영이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였다. 해방 전후에는 박칠성과 이응택, 이태운, 김종대, 백영일 등이 활약하였다. 그러나 발성영화가 등장하면서 변사들의 활동 무대는 하루가 다르게 좁아졌으며, 발성영사기가 없는 지방의 극장을 전전하다가 극장가에서 쓸쓸하게 퇴장하였다.
3) 극장 가기 또는 영화 보기, 그땐 그랬지
초기에는 영화가 짧아 영화 상영과 함께 연극, 무용, 창극 등도 공연하였다. 공연단이 도착하면 마치마와리[町廻り]라고, 낮에 동네를 돌며 흥행물을 선전한다. 맨 앞에는 극장 안에서 음료수 등을 파는 아이나 그 또래들이 두 길이나 되는 장대에 극단의 이름과 배우의 이름과 그날의 예제(藝題)를 쓴, 좁고 긴 깃발을 매단 노보리[幟]를 든다. 그 뒤에는 노랑 옷에 띠를 띠고 초립을 쓴 조라치패라고 하는 악대가 따른다. 악대 뒤에는 배우들이 단장을 하고 자기 이름을 쓴 고노보리[작은 노보리]를 꽂은 인력거에 탄다. 인력거의 서열은 엄격하여서 애기 배우가 맨 앞에 타고, 그 뒤로는 인기와 경력을 따져서 탄다. 길거리에서 쿵작쿵작 풍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면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목이 빠져라 살펴본다.
저녁이 되면 발걸음이 저절로 극장으로 향한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어 2층 발코니에는 악사들의 북소리와 나팔소리로 시끄럽다. 이것을 이레코미[入込]라 한다. 극장 직원들은 전단지를 돌리는 등 호객 행위로 바쁘다. 쥐구멍 같은 매표구에서 표를 산다.
수표원 아가씨에게 표를 낸다. 극장의 입구를 기도[木戶]라 하는데, 그곳에는 무료 입장이나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사내가 서 있다. 그들을 기도방[木戶番] 또는 기도라고 한다. 마수걸이 손님으로 여성과 초대권 손님은 절대로 받지 않는다. 아무리 절세미인, 지체 높은 귀부인이라도 예외란 없다. 코흘리개라도 사내를 먼저 들여보낸 뒤라야 입장시킨다. 객석에 다다미를 깔았기 때문에 신발은 맡기고 번호표를 받고 들어간다. 게소쿠[下足]는 손님이 벗어 놓은 신발을 말하고, 신발을 관리하는 자는 게소쿠방[下足番], 신발 맡기는 삯은 게소쿠료[下足料]라고 한다. 게소쿠료는 5전 정도인데, 무료 상영 때도 장내 정리 명목으로 받았다. 게소쿠방은 관람 후 200~300명 관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도 조금도 불편을 주지 않을 정도로 귀신같은 솜씨를 뽐낸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그중에는 카스테라나 캐러멜로 끼니를 때우며 온종일 극장에서 사는 이들도 있다. 1924년 대구경찰서는 풍기상의 문제 등을 들어 5월 1일부터 남자석, 여자석, 가족석으로 구분하도록 하였다. 중국인 몇몇이 부인석에 붙은 ‘어부인석(御婦人席)’을 보고 킬킬거린다. 그네들 문자로는 ‘부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리’라는 뜻이니 박장대소할 일이다.
장내는 생사람 잡을 정도로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손뼉을 치거나 발을 구르며 빨리 돌리라고 야단법석이다. 어린 녀석이 과자 등속을 담은 목판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사이다요 사이다. 라무네 라무네. 암빵, 빵과자요. 카라멜이요, 오징어.”라며 객석 사이를 잘도 누비고 다닌다.
드디어 악사석[囃場][하야시바]에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변사가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한다.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변사는 우스갯소리로 흥미를 돋우더니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이러쿵저러쿵 상영할 영화를 소개한다. 전자를 마에세츠[前說], 후자를 나카세츠[中說]라 한다.
필름이 돌아간다. 영사기사가 손으로 필름을 돌린다. 변사의 해설은 청산유수로 흘러가고, 관객들은 영화, 아니 변사의 입담에 울고 웃기에 바쁘다. 악사들은 간간이 제멋대로 뚱땅거리고, 필름이 낡은 탓에 스크린에는 시도 때도 없이 눈비가 오락가락한다. “변사, 좀 크게 해라.” “2층이다. 눈 멀었냐?” “사진 떤다.” 여기저기 불평들이 와글와글한다. 한 권이 끝나고, 다음 권을 바꿔 넣는다. 막간에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그사이를 못 참고, “사진기사, 밥 먹으러 갔냐?”, “오줌 누러 갔다.”, “인마, 집에 마누라 기다린다.”, “떠들지 마라!”라는 둥 소란스럽다. 다시 필름이 힘겹게 돌아간다. 러브신이 나온다. “에구머니! 어쩌면” 하고 소리 지른다. 주인공이 악한을 물리치는 장면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당시 프로그램 편성은 기록영화인 실사(實寫)를 맨 먼저 돌리고, 그다음에 서부활극이나 희극 같은 2권 정도의 단편영화, 이어서 6~7권 짜리 극영화를 돌린다. 마지막에 연속사진을 하는데 한 번에 4~5권 정도 돌리며 아슬아슬하거나 궁금증이 날 만한 데서 끊긴다. “유감이올씨다마는 하회(下回)가 어떻게 될지. 악한에게 죽을 것인지 살아날 것인지. 다음에도 변치 마시고 왕림하여 주십시요.”라는 변사의 목소리와 함께 막이 내린다. 순간 불이 확 켜지고, 눈들은 일제히 부인석으로 쏟아진다. 이내 발들이 분주하다.
여름철에는 한두 대의 선풍기로 냉방을 한다지만 찜통이며, 냄새란 냄새는 죄다 모여 산다. 겨울철에는 난로 두어 개로 난방이라고 하는데 살이 에일 정도다. 방석은 5전, 화롯불은 10전을 받고 빌려준다. 변사가 엉터리 해설을 하거나 연극이 재미없으면 집어치우라고 고함치며 무대 위로 방석을 냅다 집어던진다. 이것을 ‘방석 날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