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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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師範學校 硏究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1년 1월 대구광역시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 결사.
[개설]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1941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였다. 구성원들이 사범학교 학생들인 만큼 졸업 후 교육 현장에 나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설립 목적]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일제의 전쟁 정책이 세계대전을 초래하여 세계대전에서 필연적으로 패망하고, 그 결과 조선의 독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정세 인식에서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학술 연구 역량을 강화하여 독립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1941년 1월 23일 이무영의 하숙집에서 문예부의 강두안·이태길 등이 같은 8기생인 장세파·안진강·김영복·최낙철·윤덕섭 등과 함께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1941년 2월에 오용수·이원호·윤영석·박제민이, 3월에 양명복이 계속 가입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1940년 9월 충령탑에서 심상과 8기생 70여 명이 ‘왜관사건’[1939년 학생들의 노동력 강제 동원과 일본과 조선 학생의 마찰로 빚어진 사건]에 대한 후속책을 논의하고, 1940년 11월에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여 3학기가 시작되던 때에 이루어졌다.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표면으로는 학술 연구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는 학술 연구를 심화시켜 조선의 독립에 이바지한다는 운동 방침을 실천하는 비밀결사였다. 구성원의 전공을 살려 교육부, 공업부, 문학부, 종교부, 이과부, 전기과학부, 수학부, 문예부, 물리부, 역사부, 정치경제부, 농업부, 음악부 등의 부서를 구성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연구 발표회, 천재교육의 준비, 민족의식 고취와 동지 규합 등의 활동으로 독립에 준비할 역량을 축적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연구회의 회원들은 졸업 후 의성 안평국민학교에서 장세파, 황간 남성국민학교에서 오용수, 나진 약초국민학교에서 최낙철, 영월 공립국민학교에서 이태길이 학생 교육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1941년 7월 말 충청남도 홍성에서 교사로 종사하던 정현이 갖고 있던 『반딧불』이 관헌에 발각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문예부 부원을 포함한 300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43년 2월 예심을 거쳐 1943년 12월 최종 판결에서 35명이 징역 5년에서 2년 6월까지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그 가운데 장세파와 박제민은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전시체제기에 문예부를 계승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활동을 펼친 194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