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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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新聞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삼조 |
설립 시기/일시 | 1908년 9월 - 『대구신문』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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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대구신문사조합 -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 |
성격 | 신문사 |
[정의]
1908년 대구광역시에서 일본인이 창간한 신문.
[변천]
1900년대 말 대구 지역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구일일신문사와 대구신보사가 있었다. 1908년 9월 대구일일신문사와 대구신보사가 통합하여 대구부 경정 2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에 대구신문사조합을 설립하고 『대구신문(大邱新聞)』을 창간하였다.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는 대구일일신문사, 가토 이치로[加藤一郞]는 대구신보사의 이사가 되어 『대구신문』을 공동 경영하였다. 1909년 말 약 1,000원의 적자가 나면서, 대구일일신문사와 대구신보사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대구신보사에서 1909년 3월 대구신문사조합을 해산하자고 제의하자 이나모토 신신[稻本新臣]은 가와이 아사오와 가토 이치로를 제거하고 자신이 대구신문사조합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나모토 신신·아오키 시게노부[靑木重信]·가토 이치로가 교섭위원으로 천거되었고, 교섭위원들은 대구일일신문사의 출자금을 매수하여 신문사 경영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대구신문』을 단독 경영하려던 가와이 아사오의 움직임은 좌절되었다. 이 와중에 대구신문사조합 내 회계 부정이 발생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고 신문 인쇄를 거부하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1909년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 간 발생한 분규로 인하여 『대구신문』의 발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09년 8월 2일 가토 이치로의 주선으로 대구신보사의 13명이 연명 날인하여 가와이 아사오가 경영 일체를 위임을 받아 『대구신문』의 사장이 되었다. 1911년 8월 가와이 아사오는 대구신보사 출자자에게서 무상 양도증을 받아 독자적으로 『대구신문』을 운영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신문』은 1909년 1월호부터 12면으로 발행하였다. 1909년 7월 20일 1,000호 기념호를 발행하고, 7월 25일 서양 요리점 야마토화단[大和花壇]에서 축하회를 개최하였다.
[현황]
대구신문사는 1912년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기후, 역사, 인구, 교육, 재정 및 농업, 상업 등을 기록한 『선남요람(鮮南要覽)』을 발간하였다. 대구신문사 사장 가와이 아사오는 1904년부터 1931년까지 약 25년 동안 대구 지역 일본인의 역사가 담긴 『대구물어(大邱物語)』를 집필·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