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3·10 대구동문시장 만세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67
한자 三十大邱東門市場 萬歲運動
이칭/별칭 대구 3·1운동,제2차 대구 독립 만세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연표보기 - 3·10 대구동문시장 만세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연표보기 - 3·10 대구동문시장 만세운동 종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박태현|박성용|박남준|김재소|서상철|김윤덕|김치운|이덕주|김재병

[정의]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동문시장은 ‘대구신장’이라 불리던 곳이다. 1791년(정조 15) 남문 밖에서 동문 밖[현 한일극장에서 대구백화점 일대]으로 이설된 시장이다. 4일과 9일에 개장하였던 동문시장은 도내 각지의 5일장을 연결하는 중심지였다. 1917년 8월 지금의 덕산동 일대로 이설되었고 현재는 염매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후 파고다공원에 모인 5,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으로 3·1운동이 확산되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대구에서 제일 먼저 3·1운동 시위가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8일 제1차 대구 독립 만세 운동인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시작점으로 하여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각 지역에서 약 두 달 동안 일어났고, 2만 7000여 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제2차 대구 독립 만세 운동인 3·10 대구동문시장 만세운동(三·一十大邱東門市場萬歲運動)도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였다.

[경과]

3·10 대구동문시장 만세운동3·8 서문시장 만세 시위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1919년 3월 8일 서문밖시장[서문시장]에서 일어난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서 검거를 피한 학생들은 3월 9일 서문밖시장 근처 달성공원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 학생 박태현·박성용,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학생 박남준·김재소 등이 지방민 서상철·김윤덕·김치운·이덕주·김재병 등과 논의하여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펼쳐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4시 무렵 장꾼으로 가장한 시위 지도부가 동문시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약 200명이 동참하였다. 독립 만세 시위에 경계를 하고 있던 일본 관헌이 즉각 투입되어 65명이 체포되면서 만세 시위는 끝나 버렸다. 체포된 65명 가운데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9명이었다.

[결과]

3·10 대구동문시장 만세운동의 여파는 1919년 3월 24까지 대구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 투쟁으로 이어졌다. 대구고등보통학교는 1919년 5월 20일에야 정상수업이 이루어질 정도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