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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서원 이건기문 편액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84
한자 硏經書院 移建記文 篇額
영어공식명칭 Yeongyeong-seowon Igeongimun Pyeonaek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복현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775년 4월연표보기 - 연경서원 이건기문 편액 제작
출토|발굴 시기/일시 2016년 3월 - 연경서원 이건기문 편액 달성서씨 체화당에서 발굴
원소재지 연경서원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지도보기
출토|발견지 달성서씨 체화당 - 대구광역시 북구 복현동 지도보기
성격 액자
재질 소나무
크기(높이,길이,너비) 120㎝[가로]|40㎝[세로]|3㎝[두께]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연경서원의 이건을 기록한 편액.

[개설]

연경서원 이건기문 편액(硏經書院移建記文篇額)은 조선 후기에 대구 지역의 유학 교육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담당하였던 연경서원의 1775년 이건에 관하여 기록한 편액이다. 대구 지역 최초의 서원이었던 연경서원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세워졌는데, 1563년(명종 18)에 건립을 시작하여 1564년에 상량을 하고 1567년에 완공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2년(선조 35)에 일부 건물을 중건하였으며 1645년(인조 23)에 강당을 중건하였다. 1774년(영조 50)에는 6월 21일에 여름 폭우로 묘우(廟宇)[사당]가 훼손되어 년 7월 10일에 경상도 도회(道會)를 열어 묘우와 강당 등 서원 전체를 기존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40보 되는 지점으로 옮기기로 결의하였다. 이건(移建)에는 1년여가 소요되었고 1775년 4월에 대구부사 이상진(李商進)이 지은 이건기문을 액자로 만들어 강당에 게시하였는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연경서원이 훼철된 이후 이건기문 편액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제작된 지 250여 년이 흐르고 서원이 훼철된 지 145년 만인 2016년 3월에 대구광역시 북구 복현동에 있는 달성서씨(達城徐氏) 체화당(棣華堂)에서 발굴되었다.

[형태]

연경서원 이건기문 편액은 가로 120㎝, 세로 40㎝, 두께 3㎝의 소나무 판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건기문을 오목새김하였다. 글의 내용은 구본욱이 번역하였다.

“부(府)의 관아에서 20리 되는 거리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화암(畫巖)이라고 하는데, 그 곁에 연경서원이 있다. 서원을 창건할 때 대구의 장보(章甫)[유림]들이 부사(府使)와 상의하여 원우(院宇)를 건립하여 학자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다. 계축년(癸丑)[1613년(광해군 5)]에 퇴도(退陶) 이선생(李先生)을 사당에 봉안하였으며, 한강(寒岡)우복(愚伏) 두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갑오년(甲午)[1774년(영조 50)] 여름 6월에 큰 비가 내려 산사태가 나서 묘우가 훼손되었다. 부(府)의 유림들이 황망히 논의하여 서원을 동쪽으로 이건하기로 하였다. 이때 내가 마침 통판(通判)[대구부사]으로 있었는데 돈과 곡식을 약간 출연하였고, 순찰사(巡察使) 민공(閔公) 홍열(弘烈)과 윤공(尹公) 양후(養厚)께서 서로 이어서 부조하였으며, 도내(道內) 향교와 서원에서 모두 부조를 하였다. 이해 7월에 시작하여 그다음 해 4월에 낙성(落成)을 하니, 통강(講誦)을 하는 당(堂)과 학업을 익히는 재(齋), 포주(庖廚)[부엌], 고구(庫廐)[창고와 마굿간]에 이르기까지 구비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질서정연하고 넓으나 사치스럽지 아니하다. 사인(士人) 우명휴(禹命休), 채시용(蔡時容), 서도수(徐道洙), 곽원택(郭元澤) 등이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나에게 그 전말을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서원이 설립된 지 오래되었는데 그 본래의 기능은 학자들이 경전을 연구하며 토론을 하고, 시서(詩書)와 육례(六藝)의 글을 강학하고, 제향의 절차를 밝히고, 승강부앙(升降俯仰)[오르고 내림, 고개를 숙이고 듦, 즉 작은 예절]의 의식을 익히는 데에 있다. 이목(耳目)을 밝혀 심체(心體)를 편안하게 하여 그 일을 이룸에 이르러서는 가정을 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길흉군빈가(吉凶軍賓嘉)의 오례(五禮)의 실체가 마음속에 찬란하지 않음이 없으니, 집에 거할 때에는 효를 다하고, 임금을 섬김에 그 충을 다하니 이것이 그 실제이다. 제생(諸生)들은 힘쓸지어다. 이에 기문을 쓰노라. 숭정 기원후 삼을미(三乙未)[1775년(영조 51)] 4월 상순 통판 이상진(李商進) 기문을 짓다[距府門二十里, 有巖特起削立曰, 畫巖, 其傍有書院曰, 硏經. 其始也, 邑中章甫, 謀于地主, 營立院宇, 爲學者, 藏修之所. 癸丑享, 我 退陶李先生, 追配寒岡, 愚伏, 兩先生. 歲甲午夏, 六月, 大雨, 水, 山脥衝決, 廟宇崩壓. 邑之士遑遑也, 遂議移建于東麓. 于時, 余適通判州事. 出捐若干財粟, 巡察使 閔公 弘烈, 尹公養厚, 相繼助之, 道內各邑校院, 咸各有助. 經始于其年七月, 落成于明年四月, 講誦之堂, 肄習之齋, 至於庖廚庫廐, 莫不咸備. 整整翼翼, 閎而不侈. 士人 禹命休 蔡時容 徐道洙 郭元澤 等, 實相其役, 請記顚末余. 惟書院之設, 闕惟久矣, 其本盖爲學者, 硏經討議, 講乎詩書六藝之文, 明乎俎豆獻酒之節, 習乎升降俯仰之儀. 使其耳目開明, 心體舒愉, 及其成也, 治國正家之謨, 吉凶軍賓之體, 無不燦然於胸中, 居家則盡其孝, 事君則盡其忠, 此其實也. 諸生其勉之哉. 是爲記. 崇禎 紀元後 三乙未 四月 上澣 完山 通判 李商進 任之記].”

[의의와 평가]

연경서원 이건기문은 1832년에 편찬된 『대구부읍지(大丘府邑誌)』에 일부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2016년 이건기문 편액이 발굴됨으로써 기문 전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연경서원 이건기문 편액은 1567년(명종 22)에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이 지은 연경서원 기문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지은 연경서원 기문 후기 등과 함께, 2014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연경서원 중건 운동에 힘을 실어 주는 역사적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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