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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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永海 |
영어공식명칭 | Kwon Yeongh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8월 12일 - 권영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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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8년 3월 12일 - 권영해 진평동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3월 14일 - 권영해 진평동 만세 시위 주도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4월 25일 - 권영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6월 23일 - 권영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내당동 -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 |
거주|이주지 | 구미 - 경상북도 구미시 |
활동지 | 진평동 -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진평교회 목사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권영해(權永海)[1885~1947]는 1885년 8월 1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서 태어났다. 경상북도 칠곡군 인평면 진평동[현 구미시 진평동]의 진평교회 목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3월 14일 진평동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권영해는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1919년 3월 7일 인동교회 목사 이상백(李相栢)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으로부터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권영해는 이상백·이내성(李乃成) 등과 함께 교인과 동민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권영해는 3월 12일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마을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붙였다. 오후 8시에 진평동 뒷산에서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신자들과 동민들의 독립운동 의지가 더욱 높아짐에 따라 권영해는 다시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고,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수십 명의 군중을 이끌고 같은 장소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권영해는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권영해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