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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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容澤 |
영어공식명칭 | Kwon Yongtae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권용택 제2차 유림단 의거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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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6년 6월 4일 - 권용택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조중지 처분으로 석방 |
출생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권용택(權容澤)[?~?]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1926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29일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인 「파리장서」를 제출[제1차 유림단 의거]하였던 유림단(儒林團)은 장기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유림단 대표 김창숙(金昌淑)은 1925년 4월부터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던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논의하면서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우선 베이징 근처 스징산[石景山] 주변의 미개간지를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기로 하고 필요한 경비 20만 원을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일대에서 마련하기로 하였다. 1925년 6월 말 송영호가 먼저 귀국하였고, 김화식과 김창숙은 각각 7월과 8월에 국내에 들어와 서울을 기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으나 성과가 부진하였다.
김창숙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하여 1925년 12월 말 대구로 내려와 김화식·송영우·김헌식·박영로·김창백·이수기·홍묵·이동흠·이종흠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대책을 구상하였다. 김창숙 등은 대구를 기점으로 안동·예안·봉화 등 경상도 전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 독립 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또한 식민 통치 기구 파괴와 친일 부호 응징 계획도 세웠다. 권용택도 대구 지역의 인사들과 함께 유림단 활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모금액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치고 일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김창숙은 국내 모금 활동을 정리하기로 하고 1926년 3월 26일 봉천에 도착하여 김창탁에게서 모집한 독립운동 자금 3,350원을 인계받았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이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5월 중순까지 61명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권용택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대정8년 제령 제7호」와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26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소중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