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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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重潤 |
영어공식명칭 | Kwon Jungy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권중윤(權重潤)[1900~1928]은 1900년 2월 3일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권의윤 등은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권중윤도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8일 권중윤은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1,0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권중윤은 191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중윤은 1928년 1월 3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권중윤의 공적을 기려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