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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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武烈 |
영어공식명칭 | Kim Muyeol |
이칭/별칭 | 김성열(金聖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 김무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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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0년 - 김무열 대구 재무감독국 감독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김무열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국내 잠입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7월 20일 - 김무열 국내로 잠입하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5월 30일 - 김무열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9월 13일 - 김무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김무열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계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1가 |계산동2가 |
활동지 | 만주 - 중국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대공단 단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무열(金武烈)[1887~1929]은 1887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계산동1가·계산동2가]에서 태어났다. 중국 만주에서 대공단(大公團)을 조직하고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김성열(金聖烈)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김무열은 1900년대 초 탁지부 재무관과 대구 재무감독국 감독 등을 지냈으며, 1915~1916년경에는 대구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0년 4월부터 2년 동안 인천경찰서 순사로 근무하였지만 회의감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김무열은 1920년대 중반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에 반발하여 중국 만주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스스로 권총을 구입하여 사격 연습을 하였다. 이후 방용신(方鏞信) 등과 함께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대공단을 조직하고 단원 모집에 나섰다. 1928년 초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동지들과 국내로 잠입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경기도 고양군 삼송리에 거주하는 오천만(吳千萬)을 사살하였다. 중국 옌볜[延邊]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경북도 회령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으며,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龍井)의 천주교회 등에서 큰 액수의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1928년 7월 20일 김무열 등은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함경북도 종성(鍾城) 건너편에서 나룻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김무열은 1929년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9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무열의 공적을 기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