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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27
한자 金文玉
영어공식명칭 Kim Mun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2월 10일연표보기 - 김문옥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김문옥 동화사 지방학림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 - 김문옥 대구 남문 밖 시장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2일 - 김문옥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김문옥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3일 - 김문옥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
몰년 시기/일시 1955년 6월 12일연표보기 - 김문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문옥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칠성동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동화사 지방학림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동화사 지방학림 학승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문옥(金文玉)[1898~1955]은 1898년 2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불교계는 3·1운동 준비 과정뿐만 아니라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펼쳐진 만세 시위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대구에서도 3월 8일 서문시장과 3월 10일 남문 밖 시장[현 염매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지만 일제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으로 다수의 주동자들과 시위 군중이 체포되면서 시위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그러자 불교계를 중심으로 꺼져 가는 만세 시위를 다시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운동에 참여하고 대구에 내려와 있던 경성 중앙학림 학생 윤학조(尹學照)가 1919년 3월 23일 동화사 부속 지방학림에 다니던 김문옥·권청학(權淸學) 등과 만나 3·1운동의 전개 양상에 대해 설명하고 함께 만세 시위를 펼치자고 권유하였다. 김문옥은 이에 동의하고 3월 28일 동화사 심검당(尋劍堂)에 모인 지방학림 학승들과 함께 백안동시장에서 3월 30일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곧 시위 장소를 더 많은 인파가 모이는 덕산정[현 중구 덕산동] 남문 밖 시장으로 변경하고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어 3월 29일에는 대구 도심인 지금의 남산동에 있는 동화사 포교당 보현사에서 면포로 된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 김문옥동화사 지방학림 학승들은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남문 밖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자 총칼로 무장한 일제 경찰이 폭압적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김문옥은 이때 다수의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고, 7월 3일 경성고등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문옥은 1955년 6월 1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문옥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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