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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759
한자 安敬根
영어공식명칭 An KyungGun
이칭/별칭 석천(石泉),이관오(李冠五),안사준(安士俊)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6월 10일연표보기 - 안경근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3년 - 안경근 중국 노주군관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5년 - 안경근 중국 운남육군사관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안경근 정의부 군사부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안경근 황포군관학교 구대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6년 11월 - 안경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의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안경근 임시정부군사위원회 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5월 - 안경근 민주구국동지회 결성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10월 - 안경근 경북시국대책위원회 위원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11월 - 안경근 민족통일경북연맹 위원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2년 1월 9일 - 안경근 군사혁명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 언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 안경근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몰년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 안경근 사망
출생지 청계리 - 북한 황해도 신천군 평라면 청계리
거주|이주지 중국 - 중국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노주군관학교 - 중국 쓰촨성
학교|수학지 운남육군사관학교 - 중국 쓰촨성
활동지 중국 - 중국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안경근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성격 독립운동가|민족통일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경북민족통일연맹 위원장

[정의]

대구에서 할동한 민족통일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안경근(安敬根)[1896~1978]은 1896년 6월 10일 황해도 신천군 평라면 청계리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정의부(正義府)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 대구에서 자주적 남북통일을 전개하였다. 호는 석천(石泉)이고, 이관오(李冠五)·안사준(安士俊)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사촌 동생이다.

[활동 사항]

안경근은 1918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3년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노주군관학교(瀘州軍官學校)를 졸업하였고, 1925년 중화민국 운남(雲南)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정의부 군사부 위원이 되어 대일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1929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 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0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구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가 개교하자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33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였고, 12월에는 한국독립군 특무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안경근은 1936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9회 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37년 무렵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김구(金九)로부터 후방 교란의 임무를 받고 이원일(李元一)과 함께 텐진[天津]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1939년 10월 중국 쓰촨성 치장현[綦江縣]으로 이주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보선(補選)되었다. 1942년 10월 중칭[中京]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안경근은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된 뒤 분단이 가시화되자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통일 민족국가 건설에 노력을 기울였다.

안경근은 1960년 5월 대구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4·19혁명의 완수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0월 22일에는 경북시국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1월 12일 부위원장 김성달, 기획부장 안민생 등과 함께 대구 종로초등학교에서 3,000여 명이 참석한 통일문제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1월 26일 경북시국대책위원회경북민족통일연맹[민족통일경북연맹]으로 확대 개편하고 위원장이 되어 통일운동을 주도하였다. 경북민족통일연맹 결성대회에서는 남북 간 서신 왕래의 자유, 경제적 교류, 문화 교류 등의 통일 전 남북 교류의 필요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과 선전문이 채택되었다.

안경근은 1961년 2월 25일 경북민족통일연맹 상임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3·1운동 기념일을 맞아 달성공원에서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일 달성공원에서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는 남북 교류, 평화통일이 제기되었다. 안경근은 궐기대회 후 참가자들과 함께 현수막과 차량을 앞세우고 달성공원을 나와 북성로중앙통을 거쳐 반월당까지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선전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안경근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체포되어 1962년 1월 9일 군사혁명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안경근은 1978년 사망하였다.

[묘소]

안경근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안경근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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