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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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聖德 |
영어공식명칭 | Heo Seongdeok |
이칭/별칭 | 허성도(許聖徒),허도(許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허성덕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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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7일 - 허성덕 비밀결사 혜성단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허성덕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8일 - 허성덕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징역 10월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19일 - 허성덕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 언도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허성덕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삼사리 -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
학교|수학지 |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계성학교[계성중학교, 계성고등학교] 학생|3·8 서문시장 만세시위|혜성단 조직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허성덕(許聖德)[1902~1944]는 1902년 8월 28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과 3월 10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항일 비밀결사 혜성단(慧星團)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허성도(許聖徒)·허도(許鍍) 등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권의윤 등은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허성덕도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8일 허성덕은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고, 시위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허성덕은 이때 체포를 피하였으나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허성덕은 1919년 4월 17일 김수길(金壽吉)·이영식(李永植)·이종헌(李鍾憲)·이수건(李壽鍵)·이덕생(李德生)·이영옥(李榮玉) 등 계성학교 학생들 및 최재화(崔載華)·이종식(李鍾植)과 함께 비밀결사 혜성단을 결성하였다.
허성덕을 비롯한 혜성단원들은 4월 18일 「근고아동포(謹告我同胞)」, 4월 27일 「경아동포(警我同胞)」, 5월 7일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등을 배포하였으며, 민족 자산가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였다. 상인들에게는 폐점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통한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였다. 또한 대구경찰서장과 친일 인사들에게 암살 협박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14일 김수길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혜성단의 실체가 드러나 허성덕도 단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협박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허성덕은 출소 후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으며,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 6월 4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허성덕의 공적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