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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530
한자 救世軍
영어공식명칭 The Salvation Army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희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신교의 한 교파.

[개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복음 선교를 시작한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부스의 아내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실업자와 빈민이 급증하면서 큰 사회문제가 야기되었다. 부스는 실직자들에게 공정한 노동과 쾌적한 거주지가 제공되어야 하며, 빈민을 위한 은행과 법률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부스 부부는 천막을 짓고 알콜중독자, 마약중독자, 매춘부 등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야학, 주일학교, 저축은행을 운영하였다.

초기에는 기독교선교회[Christian Mission]를 조직하여 선교와 전도에 전념하다가 선교국을 조직하여 빈민들에게 식량과 주택을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1878년 부스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로 군대와 유사한 조직을 갖추면서 선교회 명칭을 ‘구세군(救世軍)[Salvation Army]’이라 하였다. 1879년, 첫 번째 구세군 교회가 스코틀랜드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부스는 남자와 여자 모두 군복을 입고 계급과 군기를 제작하여 군대 체제로 바꾸었다. 구세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에 급속히 퍼져 나갔고, 미국과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구세군은 미국에서 1900년과 1906년 두 번의 지진을 겪으면서 자선냄비 모금활동으로 크게 성장하였으며, 이후 전 세계에 구세군 조직이 전파되었다. 1947년, 유엔경제사회이사회에서 특별 협의 지위(特別協議地位)[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획득하였으며, 세계 131개국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있다.

[한국의 구세군]

한국의 구세군은 1908년 10월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가 한국에 로버트 허가두(Robert Hoggard) 사관 부부를 파송하면서 구세군 활동이 시작되었다. 1916년, 한국의 구세군은 교회 78개소, 사관 87명, 교인 4,800명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1918년부터 구세군은 극빈자 급식소와 장작 배급소를 설치하여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8년 12월 한국 최초로 자선냄비로 모금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구세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는 구세군의 포교 활동을 금지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활동을 재기하였다.

[대구 지역 구세군]

대구의 구세군은 한국 최초의 구세군 사관인 로버트 허가두 부부가 내한하여 선교를 시작한 다음해인 1909년 8월 2일에 구세군대구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1913년 2월 20일 대구 사관과 하사관회가 개최되었으며, 1918년 1월 28일 대구 지역 하사관 및 영문 학생 대회를 개최하였다. 1951년 1월 6일 한국전쟁 당시 부모와 가족을 잃은 고아 50명을 모아 대구시 종로2가 4번지[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에서 대구 지역 1호 보육원을 개원하였고, 1953년 10월 10일 대구혜천원을 오픈하였다. 1976년 4월 2일 ‘대구 2영문 상량식’을 가졌으며, 5월 18일 ‘대구 2영문 신축 준공 예배’를 가졌다. 1989년 2월 1일 동대구역 상담 센터 개소식을 거행하였고, 1992년 4월 13일 남대구영문 개영 예배를 가졌다. 2009년 8월 2일 대구일영문 100주년 기념 감사 예배를 가졌다.

현재, 대구·경북 지역은 경북지방본영에 소속되어 있고, 대구에는 9개의 구세군 교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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