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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752
한자 劇場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정의]

대구광역시에 있는 연극이나 음악, 무용 따위를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하여 무대와 객석 등을 설치한 건물이나 시설.

[개설]

극장(theatre)은 그 어원이 관람석(theatron)인 데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공간 속에 배우와 관객을 연결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극장은 원래 연극을 상연하기 위하여 지은 곳인데 무용·음악·예능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20세기에 영화가 등장하면서 영화도 상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극장의 역사는 1876년 부산이 개항되고 이어서 원산[1879년], 인천[1883년], 목포[1897년], 군산[1899년] 등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극장을 건립하며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실체가 확인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은 1892년 5월 인천에 존재하였던 인부좌(仁富座)라고 하는데, 인천보다 일찍 개항한 부산에 극장이 먼저 세워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서울에는 이보다 조금 늦게 극장이 등장하였다. 조선인 극장으로 1902년에 희대(戲臺)[일명 협률사·원각사], 1903년에 광무대, 1907년에 단성사와 연흥사, 1908년에 장안사, 1912년에 우미관, 1922년에 조선극장, 1935년에 동양극장 등이 개관하였다. 일본인 극장으로는 어성좌(御成座)[1907년]를 비롯하여 본정좌(本町座)[1907년], 경성좌(京城座)[1908년], 경성고등연예관[1910년], 대정관(大正舘)[1910년], 중앙관(中央舘)[1922년] 등이 개관하였다. 한편 부산, 대구, 평양 등 지방에도 극장이 등장하여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거점 공간 역할을 하며 지역민들의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였다.

[일제강점기]

대구 최초의 극장은 1907년 3월 일본인 나카무라 기이치[中村喜一]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3가 216번지에 개관한 금좌(錦座)[니시키자]이다. 대구 영화관의 효시는 1911년 일본인 쓰지소노 지로[辻園次郞]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 대구중부교회 자리에 개관한 대구구락부(大邱俱樂部)인데, 1912년에 만담·야담·요술 등 대중연예를 흥행하는 기석(寄席)[요세]인 낭화관(浪花舘)[나니와칸]으로 바뀌었다. 그 후 칠성관[1916년], 대구좌[1918년], 조선관[1920년], 대송관[1922년경], 만경관[1923년], 영락좌[1928년], 대구키네마구락부[1938년], 대구공회당[1931년] 등이 개관하였다.

칠성관은 뒤에 대영관[1924년경], 대경관[1927년], 호락관[1933년]으로 바뀌며 1938년까지 존속하였다. 대송관은 뒤에 대영관[1927년 무렵]·소명관[1929년]·신흥관[1931년]·대구송죽영화극장[1940년]으로 바뀌었으며, 해방 후에는 관명이 조선영화극장·대구송죽영화극장·송죽극장으로 바뀌었고, 2009년에 연극 공연을 주로 하는 300석 규모의 송죽씨어터로 바뀌었다.

영락좌는 1928년 8월에 요세로 개관하였고, 1930년 무렵에 영화관인 영락관으로 바뀌었으며, 1943년에 대구동보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다시 영락관이라고 하였다가 1946년 8월부터 자유극장으로 바뀌었다가 2002년 2월 말에 종영하였다. 대구키네마구락부는 1938년 8월 동성로에 개관하였다. 1943년 무렵 대구보총극장으로 바뀌었으며, 해방 후 키네마·문화극장·국립극장·한일극장 등으로 바뀌었다가 2000년 12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단관 시대]

6·25전쟁이 끝나자 대구 지역에 ‘시민의 휴식처로서 또한 문화의 전당으로서 향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라는 명분으로 극장이 속속 개관하였다. 주로 흥행이 보장되는 도심과 도심 인근에 건립하였고, 시가지 변두리에는 주로 시장 부근에 건립하였다. 대부분 관객이 많은 연말연시나 구정, 추석 무렵에 개관하였다.

1950년대에는 1955년에 서부극장·시민극장이 개관하였고, 1956년에는 동부극장·신성극장·대도극장·신진극장이 개관하였다. 1957년에는 달성극장·칠성극장·제일극장이, 1959년에는 국제극장·현대극장이 개관하였다.

1960년대에도 여러 극장이 속속 등장하였다. 1960년에 대한극장·남도극장이 개관하였고, 1961년에는 아카데미극장이, 1963년에는 코리아극장·아세아극장·수성극장·오스카극장·부민극장이, 1964년에는 사보이극장·신도극장이 개관하였다. 1965년에는 빅토리극장·중앙극장·동신극장이 개관하였고, 1967년에는 동아극장이 개관하였다. 대구의 단관 시대는 단관 극장들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퇴장하고, 일부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변신하면서 막을 내렸다.

[소극장 시대]

1982년에 「공연법」이 개정되고 공연장 시설에 대한 법규가 완화되면서 소극장이 대거 등장하였다. 대구 지역에도 1982년 개관한 푸른극장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소극장이 부침하였다. 1990년 추석[10월 3일] 때 소극장은 해바라기, 뉴프라자, 뉴코리아, 황제극장, 피카디리, 뉴스타, 코스모스, 무지개, 브로드웨이, 서울극장, 푸른극장, 롯데극장, 명동극장, 티파니, 명화극장, 시네마준, 스카라, 가고파, 신라극장, 서라벌 등 20개였다. 10년 뒤인 2000년 추석[9월 12일] 때는 그랑프리, 동성아트홀, 해바리기 등 3곳만 남았고, 냉천과 팔공산에 자동차극장이 있었다. 무지개극장-자유극장, 키네마극장-한일극장, 시네마준-대구극장, 뉴스타-아카데미극장 등은 자매 극장이었다.

[멀티플렉스 시대]

1994년 11월에 만경관이 대구 지역 최초로 2개 관의 복합상영관으로 바뀌었고, 1997년 2월에 아세아극장이 2개 관의 씨네아시아로 바뀌었으며, 1997년 8월에는 3개 관의 중앙시네마타운이 개관하였다. 2000년 12월 2일에 한일극장이 7개 관으로 멀티플렉스 시대를 열었다. 아카데미는 2001년 12월 22일에 6개 관의 아카데미시네마로, 만경관은 2002년 8월 1일에 15개관의 MMC만경관으로 변신하였다. 그 후 한일극장은 2012년 12월 28일 CGV대구한일로 바뀌었다. 이 무렵부터 여러 개의 멀티플렉스가 등장하여 부침을 거듭하였다. 2007년에 12개 관의 CGV대구, 2008년에 9개 관의 롯데시네마동성로, 2010년에 6개 관의 롯데시네마율하관, 2011년에 6개 관의 CGV대구현대와 10개 관의 CGV대구스타디움, 7개 관의 CGV이시아폴리스 등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개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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