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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복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22
한자 趙福今
영어공식명칭 Cho Bokgeum
이칭/별칭 장경순(張敬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세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1년 7월 7일연표보기 - 조복금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6년 1월 - 조복금 여자잠업강습소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7월 - 조복금 근우회 하동지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2월 - 조복금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7월 - 조복금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32년 7월 - 조복금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33년 8월 - 조복금 전북교원비밀결사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34년 5월 - 조복금 전주지방법원에서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
추모 시기/일시 2018년연표보기 - 조복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하동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거주|이주지 하동 - 경상남도 하동군
거주|이주지 부산 - 부산광역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여자잠업강습소 - 경상남도 진주시
활동지 하동 - 경상남도 하동군
활동지 부산 - 부산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여성운동가
성별 여성
대표 경력 근우회 하동지회 서무재정부 책임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여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조복금(趙福今)[1911~?]은 1911년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에서 태어났다. 하동에서 근우회(槿友會) 하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대구에서 서인식(徐寅植) 등과 함께 항일투쟁 및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장경순(張敬淳)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조복금은 1926년 1월 말 경상남도 진주에서 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한 뒤 고향인 하동에서 여성단체 및 청년단체 활동에 참가하였다. 1927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28년 7월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김한순(金漢順)·채소정(蔡小丁) 등과 함께 근우회 하동지회를 조직하고 서무재정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1931년 12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보안법」·「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이후 조복금은 조선방직회사에서 함께 활동한 제영순·김계정(金桂正) 등과 함께 대구로 활동지를 옮겨 하동 출신 권대형(權大衡) 등이 1931년 7월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할 때 참여하였다. 조복금권대형서인식 등이 발간한 기관지 『봉화(烽火)』와 『코뮤니스트』 등 출판물을 배포하고 전매국(專賣局)이나 고무공장 등에서 반일 선전과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복금은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과 형사에게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932년 7월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조복금은 1933년 8월 전북교원비밀결사사건[일명 전북교원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김태순(金兌淳)·김경조(金京祚) 등과 함께 하동에서 전주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조금복은 오랫동안 임실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뒤 1934년 4월 전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으나, 5월 초순경 다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조복금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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