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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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巖書堂 |
영어공식명칭 | DokamSeod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독암서당」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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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49년 - 「독암서당」최상룡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독암서당」간행 |
배경 지역 | 「독암서당」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한시|근체시|칠언율시 |
작가 | 최상룡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최상룡이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독암서당을 주제로 지은 한시.
[개설]
최상룡(崔象龍)[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독암서당(獨巖書堂)」는 8행으로 이루어진 칠언율시이다. 최상룡의 문집 『봉촌선생문집(鳳村先生文集)』 1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독암서당」의 전문이다.
공악지남금수동(公嶽之南錦水東)[팔공산의 남쪽 금호강의 동쪽]/거연천석봉촌중(居然泉石鳳村中)[거연한 산수 봉촌의 사이에]/
일당량실규모득(一堂兩室規摸得)[두 칸 규모의 한 서당을 얻었으니]/십리삼봉포치웅(十里三峯舖置雄)[십리 안 포치된 세 봉우리 웅장하구나]/
취족어사정화족(聚族於斯情話足)[여기에 친족들 모여 담소하기 충분하고]/유붕용여강론통(有朋容與講論通)[벗들과 더불어 강론하기 좋구나]/
구완구미공성일(苟完苟美功成日)[충분히 갖추고 아름다운 공을 이룬 날에]/경문하인차락동(更問何人此樂同)[이 즐거움을 누구와 함께 할지 다시 물으리]
[특징]
「독암서당」은 1·2·4·6·8구(句)에 동(東) 계열의 운자를 두었다.
[의의와 평가]
독암서당은 최씨문중이 최씨문중의 후손들 공부를 위해 지었지만, 최씨 문중 자손들은 물론 근방 지역 자제들에게도 강학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 강학 공간이다. 「독암서당」은 독암서당을 중심으로 한 주변 풍광을 노래하고, 앞으로 서당이 훌륭한 강학의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최상룡의 염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